내일이 있는 자유스러움을 얻으려면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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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있는 자유스러움을 얻으려면

본문

질문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옵니다. 그런데 저희들 앞에 펼쳐진 삶은 암울하기만 합니다. 위정자의 잘못된 처신 때문에 수없이 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주말이면 광화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새해에는 마음공부를 하는 저희들이 어떻게 마음을 내야 암울한 어둠을 거둬 버리고 내일이 있는 자유스러움을 얻어서 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 모두가 힘들어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희망차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본래 우리는 어저께도 없고 내일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금방 무슨 말을 했는데 금방 없어졌으니 벌써 과거가 됐습니다. 그래서 일 초 전도 과거인 것이죠. 어떤 분들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팔자 운명이 이럴까.’ 하고 한탄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일 초 전도 과거라는 거를 알고 내가 천차만별로 공했다고 돌린다면 자유스럽게 마음을 쓸 수 있거든요. 움죽거리지 않는 데를 뚫고 깨뜨리려면, 그리고 내일이 있게 살려면 그렇게 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마음에 움죽거리지 않는 주장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깨트리고, 또 나와서 이 우주의 움죽거리지 않는 데까지 결과적으로 뚫으면 그냥 자유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이름은 많습니다. ‘그 선을 넘어야 한다. 깨트려야 한다. 증득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근데 말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말이 무슨 소용 있느냐고요. 지금 내가 묵묵히 실천하는 게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내일이 있는 자유스러움을 맛보려면 그 움죽거리지 않는 것까지 치고 넘어가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덕산 스님이라는 고승이 계셨는데, 대선사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뛰어넘게 하려고 바리때 들고 척 나갔더니 대중들이 시간도 안 됐는데 왜 왔느냐고, 종도 안 쳤는데 왜 왔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말 다 했죠, 뭐. 말이 뭐 이어지기나 해요, 어디? 시간도 안 되고 종도 안 울렸는데 왜 나왔느냐, 어청거리느냐 이 소리인데. 그러니 바리때를 들고 나갔다가 ‘이거를 어떻게 무마를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에 돌아서서, 그 다음에 한판 웃는 걸로 그걸 무마를 시켰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도 못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말후구를 알겠습니까. 자기네들이 모르는 줄 모르고 저 스님이 말후구를 모른다 이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리를 모르는, 자기 앞도 채 못 가리는 사람이 어떻게 말후구를 아느냐는 얘기죠.

참, 예전에 선사들께서는 그렇게 마음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뛰어넘어 가게 하기 위해서 기왓장을 갈아서 면경을 만든다고 하기도 하고 별짓 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드물기는 하지만 그거를 정말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둥그렇게 그려 놓고 “여기 들어오면 넌 죽는다.” 이러니까 스르르 발로 지우고선 그냥 들어가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묘미가 있고 그렇게 허공 길을 아는 사람이라야 허공 길을 묻지 않고 들어갈 수가 있지 어떻게 묻지 않고 들어갈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그건 물어서 될 일도 아니고 또 안 물어서 될 일도 아니죠.

그러니까 차츰차츰 점수 행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 모두 공식한다면 공생으로서 공심이 되고 공체로서 공용을 할 겁니다. 즉 말하자면 공생을 알면 공심을 알고 공심을 알면 공체도 알고 공체를 알면 바로 공용도 알고 공용을 알면 공식을 안다는 거죠. 안이비설신의 자체가 한데 합치면 원식이 됩니다. 이게 공식이죠. 먹는 것만 공식이 아닙니다. 먹는 것만 가지고 공식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닥치는 대로 내가 한데로 흡수할 수 있어야 집어먹는 게 되겠지요. 체가 없는 거를 만 개를 집어넣으면 어떻고 수만 개를 집어넣으면 어떻습니까. 그게 두드러집니까? 그래서 마음에다가 수만 개를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줄지 않는다고 했던 거죠. 마음은 그렇게 무궁무진한 겁니다.

여러분이 지구라고 말하지만 그게 우리 생명들이 살 수 있는 주머니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병 속에 새를 한 마리 길렀는데 병은 그대로 있고 새는 커졌으니 어떻게 그걸 꺼낼 수 있겠느냐?” 하셨다지 않습니까. 공부하는 수좌들이 그걸 꺼내지 못해서 애를 쓰고 다니다가 끝을 못 보고 그러는 사람들이 많죠. 왜 끝을 못 보겠습니까. 글쎄 자기 몸이 병 속인 줄 모르고 말입니다. 자기 마음이 새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선언을 해 놨는데, ‘고등 동물인 사람은 그와 같이 마음대로 마음을 쓸 수 있다, 자유스럽게 마음을 쓸 수 있으니 나가려면 나가고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맘대로 하라’고 선언을 해 놨는데 그것을 못하는 겁니다. 아, 병이야 고대로 있죠. 어떻게 병이 커지나요? 새가 커지면 자연적으로 나올 줄도 알아야죠. 이렇게 오글랑노글랑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 그 병에서 새 한 마리도 못 꺼내죠.

그리고 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선지식들이 방편으로 말씀해 놓으신 거, 남전 스님이 고양이를 죽였다든가 하는 이유를 ‘이것이 무슨 뜻으로 이렇겠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해요. 또 조주 스님은 짚신짝 하나를 머리에 이고 나갔다는데 그건 어떤 이치로 그랬나 하는 것도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좀 자기가 튀어나와서 자유자재할 줄을 알아야 내일도 알고 내일도 있는 거지, 그걸 자유자재 못하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암흑 속에서 그냥 사는 겁니다. 그걸 바꿔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아주 특별한 말인 줄 알지만 원래 그렇게 돼 있어요. 그렇게 돼 있는 그 가운데서 우리가 모두 복작거린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내일도 없고 어저께도 없고 오늘도 없는 그 가운데 주장자도 박차야 내일이 있는 세상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잘 살고 있는 줄로 알지 마세요. ‘우린 주머니 안에서 꼼짝 못하고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그저 닥쳐오는 대로 살고 있으니 자유는 영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시고 내일이 있는 자유를 한번 맛보시게끔 꼭 공부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이 없고 어저께도 없는 오늘, 이 주머니 속에서 허덕이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내일이 없고 어저께가 없는 그런 속에서 내일이 있는 세계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자유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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