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관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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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음공부 하는 저희들이 관할 때에 주로 가슴 쪽에다 그 마음을 응시하고서 그쪽에 주인공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마음을 내는 분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생각을 낸다 하면 머리 쪽 그쪽으로 해서 무슨 흰, 아주 밝은 광채 같은 그 느낌이 들면서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아서 그곳을 의식하면서 관하는데요, 주인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관해야 하나요? 물론 큰스님께서도 가슴을 이렇게 지적하시면서 법문 중에 관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주인공이라는 건 어디 특별히 있는 게 아닌 줄은 압니다만 거기에 대해서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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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이거 봐요. 우리가 지금 말을 하죠. 말을 수없이 바꿔서 말을 해도 그 말 나오는 데는 지적을 할 수가 없죠. 말을 하기는 하는데 그 말이 어디서 나오는지 지적은 못하죠. 지적을 못하죠? 못하는데 이렇게 모든 에너지가 이렇게 한 그릇이 모여 있으니까 이 가운데서 그냥 그 에너지 소리가 하려면 나오고 안 하려면 막히고 그러죠. 그러니깐 이 모습이 있으니까 이 모습에서 공생으로써 공용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네가 제일이냐 내가 제일이냐…, 뱀이 가다가 ‘머리가 제일이냐 꽁지가 제일이냐’ 이러고 싸우지 않도록 돼 있는 거예요. 이게 몸체가 돼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 이건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이건 현실도 공했으니까 공한 대로 네가 결정하고, 그것이 바로 공심의 법이다 이거죠. 그러니깐 머리도 아니고 심장도 아니고 팔도 아니고 다리도 아니고, 모든 게 아닌 그것 때문에 되는 거예요. 아닌 것 때문에. 아닌 것 때문에요.
그래서 이런 말을 했죠. “부처님은 어디서 찾습니까?” 그러니깐 “귀신 방귀씨는 심었느냐.” 이러거든요. 그래서 아는 사람은 “예. 심긴 했는데 기르는 걸 어떻게 길러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아, 그거 뭐 어려우냐. 귀신 방귀씨를 심었으면 방귀털을 더 먹이지도 말고 덜 먹이지도 말고 그걸 잘 아구창 나지 않게 먹이면 되지.” 이런 게 우리가 지금 관하는 겁니다. 자기 앞에 닥치는 대로거든요. 그걸 ‘내가 잘한다’ 이러고선 과용을 하지 말고 그냥 남한테 해롭게 하지 말고 하는 거, 남을 이익하게 하는 거, 그래서 나도 남을 이익하게 했으니까 좋은 거죠. 좋은 마음이죠. 남이 이익하고 잘되는 거 보면 참 좋죠. 안되는 거 보면 참 심장이 좋지 않고요. 그러니깐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것이 이 물 한 모금 먹는데 이거를 누가 먹었다고 할 수 있나 이겁니다. ‘이거 누가 먹었다고 할 수 있나’가 바로 그 에너집니다. 그것을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자불이라고 부르고 불성이라고 불러요. 그것은 이름 없는 이름이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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