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가책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본문
질문
스님, 똑같은 정도의 죄를 짓고도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사람은 아주 가책에 못 이겨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죄는 좀 지었기로서니 그게 뭐 그토록 가책 받을 바 있느냐.’ 하고 이 정도로 일해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왜 그렇게 나누어지게 되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그게 두 가지가 다 글러요. 두 가지가 다 나쁘다고요. 가책을 받지 않을 일이라면 그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이거든. 그거는 그저 가서 사과를 하고 이러면 되는데, 그렇지 않은 가책 받을 일, 그건 아예 그렇게 하려면 하질 말아야 되겠지요. 또 ‘그까짓 걸 뭘 그래? 가책을 뭘 받아?’ 이러고 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것이 자기 앞에 돌아오게끔 돼 있죠.
그러니 우리가 그 가책을 받는다 한다면 양심이라도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요다음에 그런 짓을 다시는 안 할 거예요, 괴로워서. 그렇지만 ‘그까짓 걸 뭘 가책을 받아?’ 이럴 때는 그 사람은 능히 그런 일을 더 저지르고도 남음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한 거를 회개하기 이전에 잘못하질 않는다면 회개도 할 것이 없죠.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거는 어떤 때는 혹시나 잘못되는 일로 갈까 두려운 얘기가 있습니다. ‘야, 모든 거를 주인공에 맡겨 놔라.’ 이럴 때 ‘야, 그럼 나쁜 도둑질을 하고도 맡겨 놓으면 되느냐?’ 이렇게 생각할까 봐 말입니다. 그래서 아주 짚고 넘어가는 말이 있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상식과 도의, 의리, 도덕을 갖추어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서 부모에게 묵은 빚을 갚으며 자식들에게 햇빛을 주면서 이렇게 나가는 이 중도의 참,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간의 참마음이 우리 인간들을 조성해 내지 않았나. 그렇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만약에 “그런 것 저런 것을, 도둑질을 해도 거기다 맡기면 되겠군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그 말 자체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니까 아예 대꾸할 건덕지도 없는 거죠.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부처님의 마음 자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 마음부터 헤아려야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우주 만물만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거든요. 그렇게 될 때에는 참, 우리가 부처님이라는 그 뼈다귀 없는 뼈다귀를 세세생생에 우려먹어도 그것은 없어지질 않습니다. 젖 같은 그 물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영원토록 간직하게 하고 끄달리지 않게 하는 보배예요. 우려도 우려도 줄지도 않고, 갖다 부어도 부어도 늘지도 않고 항상…. 세상에 그런 보배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겉으로라도 부처님 하나만 모셔 놨다 하면 밥은 굶지 않으니 도대체 그 보배는 어떻게 생긴 보배기에 그렇게 좋단 말인가. 거죽 모습으로 생긴 것도 갖다 놓기만 하면 먹고 살게 해 주는데 하물며 모습 아닌 그 보배는 얼마나 윤택할 것이냐는 얘기예요. 영원토록 말이에요. 아니, 가고 오고 그런 것도 없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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