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소리에 대해서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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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소리에 대해서

본문

질문

한마음요전 수행편에 보면 “처음 공부하는 단계에서는 내면의 소리가 볼썽사나운 일을 하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 몸뚱이를 인형 놀리듯 하지 말고 마음으로 돌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안에서 나오는 대로 행동한다면 정신세계에 끄달려 사는 것이니 마치 그 이전 물질세계에 끄달려 사는 것과 같다. 고로 중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하셨는데 그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여쭙고자 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죠. 내가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는데 큰 구렁이가 똥그랗게 틀고 있더니 내가 가니깐 별안간에 고개를 반짝 들거든요. 반짝 들더니 얼마 있다가 길게 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느냐? ‘오! 똥그랗게 있었던 건 원이고, 머리를 들었던 건 백(白)이구나. 허허. 그러니 한 일(一)자로 기다랗게 있으면서 하나로 뭉쳐졌던 것은 이건 일심(一心)에서 모든 게 나가고 들어온다는 거구나, 모든 게.’ 그렇게 생각을 하고선 떡 돌아서니깐 맑은 물이 있는데 먹고 싶단 말입니다. 먹으려고 딱 가니까 똥이 마려워요. 거기다 똥을 누라는 겁니다. 그 맑은 데다가, 글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먹는 물에다가.

여러분은 만약에 내 속의 은사가, 내 스승이, 마음에서 ‘저기다 똥을 눠라.’ 이랬다면은 노예처럼 거기다 똥을 누겠습니까? 단지 똥을 누라는 겁니까, 그게? 여러분은 공부하면서 내면의 스승이 ‘똥을 누라’ 이러면 똥을 누라는 줄로만 알아요. 그 뜻을 새겨 봐라 이겁니다. 그 뒷면을 봐라 이겁니다. 네? 만약에 뜻을 모른 채 그 말 그대로만 알고서 행한다면 그냥 노예가 돼 버리는 거죠. 달리 귀신인가요? 그래서 귀신이지. 내가 귀신 짓을 안 하면 귀신이 어딨습니까? 그래서 생각을 할 때 그게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남이 오다가다 떠 먹는 물, 깨끗한 물에 똥을 누라니, 글쎄.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래서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까, 똥끝도 딱 들어갔어, 인제는. 하하하. 똥끝도 딱 들어가고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러고 있다가 생각을 하니 그게 내 뜻을 보느라고 그랬다는 생각이 났어요. 거기다 정말 시키는 대로 똥을 누느냐, 네 권도(權道)로서 네가 해결을 하느냐 이거죠, 바로. 그래서 유(有) 무(無)를 갖추어야 된다는 거죠. 현실 세상을 무시해도 안 되고 무의 세상을 무시해도 안 됩니다. 내 마음을 무시해도 안 되고, 내 생명을 무시해도 안 되고, 내 몸뚱이를 무시해도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껄껄 웃고서 똥끝도 들어갔겠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물맛 참 좋구나.” 이럭하고선 갔다니까요.

여러분은 ‘아하! 나를 가르치느라고 시공이 없는 법, 권도법에 의해서, 자유인을 만들기 위해 성장시키는 과정이구나.’ 하는 걸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놓고 이래야지, 이거는 여기서 시키는 대로 ‘저기서 호박 따 오너라’ 하면 호박 따 오고, ‘저기서 참외 따 오너라’ 그러면 참외 따오고, ‘콩 서리 해라’ 하면 콩서리 하고 그런다면 그거는 귀신 짓이다 이겁니다. 자기가 발로가 되어서도 어려워요. 그게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길잡이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먼저 길을 걸어갔다 온 사람한테 길을 인도를 받아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또 예전에 그때는 아무거나 먹고 그런 때니까, 풀을 뜯어먹고 입이 써서 힘들곤 했는데 말입니다, 소나무도 위에 난 가지를 똑똑 딸 수가 있나요? 내 목 따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밑에 나온 그냥 조그만 가지에게 ‘나 좀 도와줘!’ 그러고 따 가지고선 그걸 먹다 보니깐 떫고 시어서 그냥 입이 하나가 잔뜩 된 거죠. 아, 그래 물을 찾아서 이렇게 가다 보니까 옹당물이 있는데, 그게 맑으니까 내 얼굴도 비치는 거예요. 그런데 바가지도 없고 그래서 손으로 이렇게 뜨려니까 아, 난데없이 내 스승이 말입니다, 내면의 내 스승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야! 네 얼굴이 아니라 네 삼촌 얼굴이다.’ 이러거든요. 허허허. 그래서 ‘삼촌?’ 그러고 이렇게 보니까 보는 순간에 또 금방 화해서 ‘어이구, 얘! 네 아버지 얼굴인데.’ 이러고 또 ‘아이구, 네 자식 얼굴이야. 아니, 네 며느리 얼굴인데.’ 이러고 아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 그때는 그 소리에 그냥 멍멍해진 거예요.

물을 먹으려고 그러다가 물을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입이 시고 딱 그냥 한 입 된 게 그게 어디로 갔는지 그것도 잊은 채 그냥 멍멍히 생각을 하다가, 아무 생각도 없이 있다가 아휴,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렇게 그냥 빠르게 돌아간다는 게 그게 있을 수가 없잖아요. ‘아이고, 아빠 당신이 알아서 해!’ 그러곤 그냥 탁 놓고는 또 어디쯤 가다 보니까 ‘만사만생이 다 그냥 있는 게 없고, 산천초목의 천차만별 그 초목들도 그냥 그대로 있는 게 없다’ 이거야. 거기에서 그때 그게 생각 난 거야. (손뼉을 한 번 치시며) ‘아이쿠, 이렇구나.’ 그래서 나는 내가 나한테 배운 거지마는 내가 없더라고요. 내가 없어. 나도 없고 아빠도 없고. 왜 없느냐? 이렇게 따지니까 또 이런 생각이 납니다. 아하! 예전에 말이에요, 야, 이렇게 묘지가 (법상 위에 있는 두 개의 물컵을 가리키시면서) 있는데 “이 묘지는 아비의 묘지고 이거는 자식의 묘지인데 이 자식이 이리로 오면 아비가 되고, 요 아비가 자식한테로 가면 자식이 된다.” 이겁니다. 아, 그 생각이 문득 나는 거예요.

아, 그러니 체가 없는 마음이 쉴 사이 없이 화해서 바뀌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이 미국에서 “스님, 나 이렇게 이렇게 애를 잃어버렸는데 지금 죽겠습니다. 어떡합니까?” 하고 울고 야단들을 할 때 “알았어요.” 할 수 있는 그 대답이 나오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떡하면 좋아. 왜 그렇게 한만히 뒀어? 뭐, 어쨌어?” 하며 서로 뛸 겁니다. 그러나 말이 필요 없거든요. 여러분도 나하고 둘이 아니게 심부름꾼이자 부처자, 법신이자 화신이자, 바로 지신이자 용신이자, 관세음보살이자 지장이자, 칠성이자 독성이자 아, 부처이자 모두가 아니 되는 게 없어요. 이렇게만 해 놔도 좀 감응이 됩니까?

그러니 실질적으로 이거를 하나하나 체험을 하십시오. 하나하나 탑을 쌓아 올라가는 게 점수(漸修)라 하면, 다 쌓고 봉오라지 탁 올려놓는 게 돈오(頓悟)예요. 그러니 점수와 돈오는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니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다. 돈오다 점수다 이 언어가 붙지 않는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저 모든 걸 지켜보고 관하라 이랬죠? 그러면 “뭐 지킬 게 있느냐?” 이러고 “지키는 놈은 어떤 거냐?” 이래요, 또. 그러는데 그대로 자기가 ‘거기서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러고 거기 맡겨 놓으면, 맡기는 놈도 그놈이요, 지키는 놈도 그놈이다 이겁니다. 지켜봐라 이거예요. 그러면 거기에서 또 감응이 되고 실험이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체험을 거기서 하게 되고, 또 어떻게 닥쳐오면 갖다 놓고 또 하다 보면 체험이 되고 또 체험이 되고…. 그게 바로 하나하나 쌓아서 탑 올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물리가 터지고, 그렇게 하다 보면 홀연히 자기를 자기가 알게 되고, 그럭하다 보면 둘 아닌 도리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하다 보면 바로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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