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사후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건전한 게시판 문화를 위하여 성격에 맞지 않는 게시물, 광고 등 유해성 글들은 관리자가 임의로 이동, 삭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질문을 올리기 전에, 게시된 글들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마음공부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사후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본문

질문

스님들께서는 이 마음의 공부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기에 생명을 걸고 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우리 인생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면, 마음공부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사후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 것인지 궁급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다른 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얘기해 드릴까요? 우리가 꼭 공부는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공부를 한 사람에 한해서 그래도 진실하게 내 안으로, 낱낱이 안으로 굴려서 안으로 돌리는 거, 이 생활하는 모든 거, 죽고 사는 거, 생사윤회를, 모든 거를 내 마음 안으로 돌리는 데에 묘미가 있는 거죠. 지금도 돌려놓으라고, 놓으라고 그러듯이 말이에요.

그렇게 해 가지고 가는 사람이 만약에 죽을 때는, 죽기 전에 자기 갈 자리를 자기가 다 마련해 놓고 가요. 이건 죽는 게 아니거든요.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죽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거기에 요점이 있어요. 공부를 그렇게 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몸을 벗을 때도 벗기 전에 자기가 자기를, 벌써 정자와 난자를 쫓아서 어디를 자기가 선택해요.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가 열 달 내내 길러요. 그래서 여기서 생명이 딱 끊어지면요, 사람뿐만 아니라 저런 다른 큰 생명이 된다든가 이래도 말이에요, 그걸 꼭 사람으로만 비유하지 마세요. 사람 이외의 정말 벗어난 선인들이 된다 하더라도 그걸 정망해서 다 해 놓고, 또 사람이 된다 하면 만 아홉 달이 되지만 이 만 아홉 달은 우리 지구에서 쓰는 거지 딴 데서는 만 아홉 달이라는 게 똑같이 쓰여지질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단 순간에,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목숨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그쪽으로 가고 이 옷은 벗어요. 또 사람으로 내가 화한다 할 때는 거기 배 속에 들어가서 아홉 달 내내 길러 가지고 내가 목숨이 한 찰나에 딱 떨어질 때 벌써 그리로 가요. 이건 벌써 미리 가 있어요. 여기는 사는 습만 있다 뿐이지 그리로 가서, 바로 자기가 길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선처해서 벌써 자기를 기르고 있어요. 그래 길잡이는 자기죠. 자기 이외에 길잡이가 없어요. 그걸 아셔야 돼요.

또 공부를 안 한 사람에 한해서는 자기가 자기 개척을 못하고 자기가 길을 모르고 컴컴하고 그러니까 죽어도 누가 인도할 사람이 없단 말이에요. 살던 자기의 습이 있어 가지고 눈이 캄캄하니까. 그래서 살던 습에 의해서 자기가 착을 두고 있는 데에 그냥 머물러 버리죠. 거기에 머물러져 버리니까 때에 따라서 그 영계는 집에서 뱅뱅뱅뱅 산 사람한테 도는 거죠. 자식과 부모 뭐, 누구를 막론하고 얘기예요. 집안의 친척은 다 알지 않습니까, 자기가? 죽기 전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길은 몰라도 그 길은 알거든. 그러니깐 그 습에 의해서 뱅뱅뱅뱅 돌아다니죠, 자기에게 잘해 준 사람 앞에 또는 자기 친구한테. 그래서 그 친구로 인해서 남의 논 등에 주저앉는 법도 있죠. 저희 집 식구들이 시원치 않고 그러면 친구한테로 가거든요. 이게 참, 문제가 여기에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한 사람에 한해서, 바깥으로만 만날 돌고 다니던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길을 자기가 인도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 타의에 의해서 내가 길을 인도받아야 할 텐데 그 은사도 똑바른 사람을 못 뒀다면 그마저도 또 없는 겁니다. 그러니 캄캄하고 그래서 결국은 개집이나 뭐, 새 둥우리나 무슨 쪽제비 소굴이나 돼지 소굴이나 소 외양간으로, 뭐 이런 데로 그냥 떨어지는 거죠. 또 자기가 마음이 착해서 참, 요행히 걸려서 간다면 그 사람이 어떤 차원을 가진 줄도 모르고 그냥 그런 데로 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건 십중팔구란 말입니다. 아니, 열 번에 한 사람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열 사람이라면 그 도리를 공부하지 못한 컴컴한 사람으로서는 사람 되기가 열 명 중에 두 명 되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왜 우리에게 이득이 없느냐 하면, 인간에게도 이득이 없고 사회에도 이득이 없고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없고 세계적으로도 이익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알아요, 세계를. 예전보다도요. 예전엔 그렇게 알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안방에 앉아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 알고 있는 자기가 벌써 계발이 된 겁니다, 본래.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인식하기를, 예를 들어서 평상시에 ‘난 저게 좋다, 저게 좋다’ 이렇게는 그냥 우리가 보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잠재의식 속으로 가서 컴퓨터에, 자연 컴퓨터에 정해져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이 도리를 모르면 그렇게 박혀 있기 때문에 그 박혀 있는 대로 길을 갈 것이고, 자기가 자유권을 갖고 자유자재한다면 그대로 자기 가고 싶은 대로 미리미리 그렇게 다 해서 자기가 한 찰나에 딸칵하면 그냥 옷만 벗는 거뿐이에요. 우리가 옷을 벗으려면 훌훌 그냥 벗죠. 그 순간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옮겨 놓는 거뿐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우리 공부 못한 사람은 ‘길다, 짧다’ 이런 것이 있는데, 한 찰나다 이거야. 이쪽에서 한 찰나는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의 문제, 즉 한 찰나는 한 찰난데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야!

그러면 열 달이 걸리고 한 찰나가 걸리고 일 초가 걸리고 열흘이 걸렸다 또는 아홉 달이 걸렸다 이래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됐대도, 만약에 본래 이렇게 믿고 다니던 데에 아는 사람이 길잡이로 있다면 벌써 그것을 알게 돼 있어요. 왜?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믿고 다녔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즉시 그것을 막아 줄 수 있는 겁니다, 즉시! 막아 줄 수도 있는가 하면 그것이 아홉 달이 됐다 하더라도 일 초로 축소한단 말입니다, 이건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눈뜬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극히 어렵다. 하나 만나면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이 있는 것이죠.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그렇게 쉽습니까, 어디? 그러고도 또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 하나 만나기 참 어렵습니다.

목록

대한불교조계종 한마음선원(13908) 경기 안양시 만안구 경수대로 1282Tel. 031-470-3100Fax. 031-470-3116
Copyright (c) 2021 HANMAUM SEONWON. All Rights Reserved.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