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공부를 하여야 두려움 없이 저승세계에 갈 수 있는지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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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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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공부를 하여야 두려움 없이 저승세계에 갈 수 있는지

본문

질문

저는 제가 평생을 통해서 불법을 공부해 왔기에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다고 자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심장이 움직이지를 않아 응급실에 실려 갔다 오면서 정말 참 공부는 글자와 이론에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꿈결 같은 어둠 속에서 제가 살아온 모습들이 병풍처럼 비쳐지는 그 가운데에서 저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깨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제가 정말 어떠한 공부를 하여야 두려움 없이 저승세계에 갈 수 있는지 가르침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그래서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죠. 어느 스님께서 조용히 산등성이의 돌 위에 가서 떠억 앉아 있으려니까 어느 노승이 지나가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여보게 자네, 앉을 때가 옳은가, 앉았다 일어날 때가 옳은가?” 하더랍니다. 그러니깐 “앉고 서고 그런 게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하니까 “허허, 그래? 그러면 솥에 넣어서 푹 삶은 자갈은 물렀겠지?” 하거든. ‘솥에 넣어서 푹 삶은 자갈은 익었겠지.’ 도대체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경이라는 경은 다 제껴 봐도 그런 문구가 없어. 그 스님을 찾으려고, 경을 다 버리고 찾으려고 애써도 이름도 성도 묻지 않은 것도 실책이고, 그 스님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마을에를 들어섰는데 동짓날이 됐더랍니다. 동지가 됐는데 마당에다 큰 솥을 걸어 놓고선 팥죽을 쑤고 있거든요. 팥죽을 쑤면서 큰 주걱으로다가 휘휘 젓거든. 그런데 그 팥죽이 벌렁벌렁 끓는 걸 보고서 그때서야 ‘아이고,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면서 “스님! 찾았습니다, 스님!” 이랬답니다. 그러니 거기서 그 소리를, 그 대답을 못한 스님이나 그 말씀을 하고 간 스님이나 둘이겠습니까? 무슨 까닭에 그걸 보고서 (손바닥으로 법상을 쳐 보이시면서) “어이구, 찾았군!” 했는가 말입니다. 그 팥죽 끓는 걸 보고서 그 솥 안의 돌이 말랑말랑한 걸 알았겠느냐 이 소립니다.

천칠백 공안이라고 하더라도 이 삼천대천세계 어느 것이 화두 아닌 게 없고, 어느 것이 법 아닌 게 없고, 우리 생활 자체가 그대로 공안 아닌 게 없고, 참선 아닌 게 없으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똑바로 일러 줬는데도 불구하고 얼마 가다 보니까 단전이다 명상이다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딴 데로 나가고 있어요, 기껏 가르쳐 봐도.

본래 이 세상에 여러분이 “응아” 하고 나왔으면 그게 칼이 될 수도 있는가 하면 화두입니다. 어느 어린애든지 나올 때 “응아” 하고 소리 안 지르고 나오는 애가 없습니다. 그리고 물주머니에서 안 나오는 애가 없고. 내가 있다는 겁니다, 있다는 거! 그럼 갈아야죠! 그게 화두예요. 내가 난 게 화두고, 바로 우리가 이렇게 움죽거리고 생활하는 것이 참선이에요. 일분일초도 끊어지지 않는 참선! 숨 들이쉬고 내쉬고 이러는 게 참선이야, 그냥. 숨 들이쉬고 내쉬는 데서, 그 한 구멍으로 들고 한 구멍에서 나니 두드러지지도 않고 줄지도 않더라.

여러분은 날더러 “스님은 경전에 있는 심오한 뜻은 얘기 안 하고, 왜 이렇게 만날 저런 얘기만 할까?” 그러시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면, “솥 안에 넣고 그 솥 안의 자갈은 말랑말랑하게 익었겠지?” 한 거는 뭐며 팥죽을 쑤는 걸 보고선 (법상을 치시며) “아이쿠, 이제는 익었구나!” 돌이 익었다 이거야. 돌이 그랬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몸은 살려 놓고 저승에 가서 죽은 사람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몸을 살려 놓고 미지의 저승세계에 가서 죽은 사람을 보고 얘길 하고 죽은 사람들이 사는 도리를 다 알고서야 산 사람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똑바로 행할 수 있고, 똑바로 자비를 베풀어 에너지를 공급할 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를 자기가 모르고서야 어찌 공급을 할 수가 있으며, 길을 인도할 수 있으며 또는 여러분의 눈을 띄울 수가 있겠습니까? 밥은 내가 대신 먹어 줄 수 없지만, 그 밥을 먹게끔 할 수 있는 길잡이로서, 자기가 해 먹어 봐야 해 먹을 수 있다고 말을 하고, 해 먹을 수 있는 물리를 틔어 주게끔 해 줄 수 있지요. 그렇게 같이 마음을 내 줄 수 있는, 하나가 돼 줄 수 있는 그러한 에너지, 광력·전력·자력 이런 게 다 동시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 오시는 분들은 그냥 얘기만 듣고 가려고 하지 마세요. 얘기만 하려고 그러면 뭐, 만담하는 식이게요. 그건 소용없는 거라. 어느 만큼 얘기하는 사람이 얘기하면서도 함이 없이 하느냐? 그만큼 둘이 아니게 할 수 있겠느냐? 그만큼 자비를 베풀 수 있겠느냐? 그만큼 네 아픔과 둘이 아니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내 몸과 같이 생각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거기 대두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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