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체가 본래 한마음 한몸 한자리인 이 참뜻은?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건전한 게시판 문화를 위하여 성격에 맞지 않는 게시물, 광고 등 유해성 글들은 관리자가 임의로 이동, 삭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질문을 올리기 전에, 게시된 글들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 자체가 본래 한마음 한몸 한자리인 이 참뜻은?

본문

질문

스님께서는 내 몸으로부터 오는 문제나, 인간이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역경에서 부딪침이 없이 유유히 넘어갈 수 있으려면 우리 자체가 본래 한마음 한몸 한자리인 이 참뜻을 꼭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마음으로부터 일거일동 집착을 하게 되어 무명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나라는 틀을 벗어나서 공생, 공심, 공용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한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풀 한 포기 버리지 않는 한마음이라는 것은 한 생명과도 같은 한마음입니다. 위로는 한마음을 모시고 아래로는 여러분 몸과 더불어 함께하는 겁니다. 여러분 몸속에 들어 있는 그 모습들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육신 속에, 세포 속에 들어 있는 그 생명체들을, 그 모습들을 아실 겁니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생명체들, 모습들도 아실 겁니다. 그러기에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있는 내 몸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이 움죽거려 줘야만이 움죽거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같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공평하게, 평등하게, 시공이 없이 그냥 자동적으로 찰나찰나 움죽거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시겠죠. 이것을 잘 생각을 해 볼 점이 있습니다. 그래야 믿어질 테니까요.

그래서 몸은 자기가 소임을 맡은 대로 움죽거리면서 이 한 몸을 앞장세웠습니다. 모든 모습들과 마음들이, 위로는 마음들이요, 아래로는 그 모습들이 전부 한데 모여서 움죽거려 주는 그 역할을 그대로 우리는 한데 합쳐서 활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 마음 중심(中心), 중용(中庸), 중도(中道)라는 이름이 있기 이전, 깊은 정(定)에 들어 죽은 내 몸이여! 그대로 나투며 시공이 없이 도는 몸이로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위로는 일체가 되고, 한마음이 되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이렇게 됩니다. 공식(共食)하고 있고, 공생(共生)하고 있죠. 공용(共用)도 하고 있고요.

멀리 생각을 하지 마세요. 내 육신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이거는 한 별성이기 이전에 혹성이기도 합니다. 그 혹성 안에, 오대양 육대주가 돌아가는 거와 같이 오장육부가 그러하니깐요. 이것을 가까운 데 두고 모른다면은 우리는 우주의 전체, 무(無)와 유(有)의 세계의 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한다면 남을 알지 못하고, 내가 나를 이끌어 가지 못한다면 남을 이끌어 줄 수 없습니다. ‘나’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생겼고 상대가 생겼고 가정이 생겼고 나라가 생겼고, 천태만상으로 생긴 것이 바로 나로 인해서 생겼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어떠한 이름이나 찾고 허공이나 바라보면서 바깥 경계에 끄달리는 것이 불법이 아니며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뜻이 아닙니다. 돈이 있든 없든, 가난하든 부자든 막론하고 이것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가져야 여기 오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면 됩니다. 여러분이 마음이 있다는 사실, 그 마음으로 인해서 움죽거린다는 사실, 그리고 맛을 본다는 사실, 이것을 우리가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우리는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자동적으로, 자연적으로 쫓기며 쫓으면서, 밟히며 밟으면서 인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지금 인간의 모습으로서 이 모습을 벗기 전에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죠. 우리가 진짜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넘어가고…, 우리가 길고 긴 하나의 음식을 놓고 여러분이 걸릴까 봐 한 조각 한 조각 잘라서 먹이는 거와 같으니 그대로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짚고 넘어가는 한 토막의 문제요. 또 한 토막을 얘기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말이 아닌 참말로 들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소녀가 있었습니다. 잘 새겨들으십시오. 부모를 모시고 잘 살았는데 어느 날 아버님은 인생이 덧없다 하시고 가셨습니다. 죽었단 말입니다. 어머니는 남아서 딸을 두고 죽을 수 없다고 힘들게 버티며 살아 계시다가 어느덧 때가 되니 그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홀로이 배고픔도 이기지 못하고 추움도 이기지 못해서 닥치는 대로 먹고 닥치는 대로 불을 지폈습니다.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 집마저 훨훨 타 버렸습니다.

불씨는 그대로 불기둥이 돼서, 천 길이나 되게 불길이 솟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둘레는 만 둘레나 되니, 오고 가는 사람이 모두 두루 옷을 벗고 갔다 합니다. 그러니 그 불은 비바람이 쳐도 흔들리지 않으며, 바람이 분들 흔들리겠습니까, 비가 온들 꺼지겠습니까? 추운 겨울에 우박 눈이 쏟아진들 얼겠습니까? 그래서 오고 가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옷을 가면서 벗고 오면서 벗고, 끊임없이 벗었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애나 어른이나 가정에서도 따뜻한 데를 찾죠. 아늑한 데 찾고, 따뜻한 데 찾고, 추우면 추운 대로 따뜻한 옷을 입고, 또는 더우면 더운 대로 시원한 옷을 입죠. 이것이 그대로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진리라고 봅니다. 이 한 토막의 얘기는 여러분이 잘 들으면 아주 공부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가 타 버리더니 그렇게 불기둥이 솟았다고 합니다. 불기둥이 솟으니까 오고 가는 사람이 다, 그 빛과 광력과 자력으로 충만하니 어찌 그것이 꺼지며 바람 분다고 흔들리며 그것이 얼 수가 있느냐? 항상 봄이라, 오고 가는 사람이 옷을 벗더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반복해서 이런 말을 드리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믿고 이렇게 말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데에 위로는 한마음이요, 아래로는 모습이 한 몸이니 아픔도 한 몸! 그래서 유마힐 거사는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가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생들이 나아야 내가 낫지.” 했습니다. 여러분, 간단하게 비유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오장육부의 세포의 생명들이 나아야, 그 모습들이 건강해야 나의 모습도 건강하겠죠. 내 마음이 건강해야 남의 마음도 건강하게 해 줄 수 있고, 내 몸이 건강해야 남의 몸도 건강하게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을 이끌어 가지 못하는 동시에 남의 몸도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음미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기 오신 그 마음이 바로 한마음이요, 한 몸, 한자리입니다. 한자리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이것을 실감하시라 이겁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것이 그대로 심성 천체물리학이며 그대로 길이며 그대로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 살림살이가 그대로 과학인 것입니다. 심성을, 마음을 빼놓고는 어디 뭐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여러분은 다 가지고 계시죠. 마음으로서의, 악도 거기서 나오고 선도 나오는데 사람이라면 천 가지 만 가지 천차만별로 알고 있는 게 많으니 그 악은 쓰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마음을 낼 때도, 한생각 낼 때도 남을 이익하게 낼 수 있는 마음, 한마음을 내서 말을 해 주더라도 이익한 말, 남에게 뭣을 주더라도 뒤에 받으려고 생각하고 주는 마음이 없이 내가 쓰는 물질로 생각한다면 둘이 아닌 공덕이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이것을 받으려고 하고 이익을 보려고 하니까 싸움이 되고 부딪치고 악하게 나오고…. 그 근원이 욕심입니다. 우리가 욕심의 근원을 놓는다면 자연스럽게 습득해 가면서 체험해 가면서 아주 청정한 정(定)에서 샘물이 솟아 나와서 두두물물(頭頭物物)이라는 식대로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 한 것도, 한자리 할 때는 여러분의 몸이나 내 몸이나 두루 같이, 부처님의 뜻이나 일체 조상들의 뜻이나 다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분 어느 분, 다른 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부처님이시며 그 부처님은, 중생들이 돌봐주고 운영을 해야 사시기 때문에 그 중생들을 중생이라고 내려 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중생 부처는 둘이 아니다. 한 몸 속에 부처, 중생이 있다 이겁니다.

중심, 중용, 중도, 바로 정(定)에 든다면, 정에서 나오는 거 정에다 도로 놓는다면 그 씀씀이가 바로 유유하고 여여하고, 천 가지 만 가지에 부딪치지 않고, 시공이 없고, 윤회에 걸림이 없고 생사에도 걸림이 없습니다. 오늘 죽는다 하더라도 빙그레 웃고 죽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이 없다 함은, 즉 말하자면 하늘을 받칠 불기둥이 있고 한 발로 디뎠다면 그것은 그대로 밝기 때문에, 그대로 자력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빛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여여하며 그대로 삶과 죽음이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그러한 자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되나 못 되나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저는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 드릴 때마다…, 즉 만 골짜기에서 흐르는 더러운 물이나 깨끗한 물이나 바다로 한데 모이듯이, 그 바다로 모여서 가라앉혀서 유유히 돌듯이 이렇게 하시라는 뜻입니다. 즉 말하자면 한마디 한마디가 아마도 한 방울의 피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여직껏 걸어오신 그 피 한 방울이 그렇게 에누리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갖다 주시는 게 한 방울의 피라면 나를 위해서 갖다 준 바도 없고, 바로 자길 위해서 갖다 준 거기 때문에 나는 받은 새가 없고 자긴 가져갔으니 준 새가 없다 이겁니다. 비유하자면 가게에 뭐를 사러 가면은 내가 물건을 가져왔으니깐 돈을 준 새가 없고 또 물건을 줬으니까 받은 새가 없듯이 우리는 지금 서로서로 공식(共食)하면서 주고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목록

대한불교조계종 한마음선원(13908) 경기 안양시 만안구 경수대로 1282Tel. 031-470-3100Fax. 031-470-3116
Copyright (c) 2021 HANMAUM SEONWON. All Rights Reserved.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