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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원하는 것이 기복으로써 비는 것은 아닌지?

본문

질문

저는 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저 자신과 회사에 많은 도움이 되게끔 원을 내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실천이 되는 것에 대해서 저 자신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에 맡겨서 하나하나 체험해 나가면서, 기복 신앙이라는 데 대해서 상당히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 것이 과연 진짜 자성불에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잘되게 해 달라고 기복으로써 비는 것인지 헛갈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이 원이라고 하면 언뜻 둥근 것이 떠오르죠? 그래서 원심을 낸 거죠. 한마음이 된 거죠. 한마음으로 구성해서 통신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냥 이렇게 공부하는 거 같지만, 이거는 심성의학이기도 하고, 과학이기도 하고, 천문학이기도 하고, 천체물리학이기도 합니다. 그건 왜냐? 내가 그 몸속에 있는 의식과 모두 합쳐 한마음을 냈습니다, 한마음으로. 원이라는 그 말이 한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래 한마음을 냈는데, 한마음으로 내 가지고 보니까 바깥 경계도 한마음으로 되돌아가더란 얘기죠. 안에서 한마음이 다 이렇게 한다고 말을 할 땐, ‘원자에서 입자로 화해서 다 조절을 한다, 한마음으로.’ 내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이건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한마음을 냈는데 그것이 어떻게 비는 겁니까? 이 내 마음속으로 하는 거는 비는 게 아니고, 바깥으로 찾는 게 비는 거고 기복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주인공한테 찾는다는 것은 한마음으로 중심에 그 원을 세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을 세운 그 마음 한생각이 입자로 화해서, 즉 말하자면 통신이 되면, 먼저 한 찰나에 대뇌를 통해서 중뇌에서 책정을 합니다. 그리고 사대(四大)로 통신이 되면 그 모든 입자들이 다 한마음으로 구성이 돼서 제각기 또 벌어집니다. 일을 할 때 똑같은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요거는 말을 해야 될 일, 요거는 또 사람의 마음을 움죽거려야 될 일 등, 이렇게 각각 나가서 자기 소임을 완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천부적으로 일체를 다 구족하게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다 구족하게 가지고 있단 얘깁니다. 내가 그렇게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구족한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일러 드리는 겁니다. 당신네한테 구족하게 있으니까, 그렇게 통신이 되게 해서 그렇게 해라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안 되고 배깁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금 속마음으로 ‘저 사람을 한번 죽여 버려야겠다.’ 이런다면, 벌써 저쪽에서 ‘흥!’ 콧방귀 탁 뀌고 ‘네가 날 죽여?’ 하게 됩니다. 본인은 모르죠. 본인은 몰라도 본래 자기 속에서는 벌써 알고 ‘흥! 날 죽여?’ 그러고선 오히려 댑다 그리로 몽둥이가 들어가죠. 그러는 수도 있지만, 이쪽에서 자비스러우면, 또 그걸 알면서도 몽둥이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오히려 실의에 되빠져 가지고, 그런 마음을 버리고 다시 올라오도록 자비를 베풀죠.

그러니까 그 도리를 완벽하게 알기 위해서는 자기가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실천에 옮겨 보면서, 실험을 해 가면서, 체험을 해 가면서 자꾸자꾸 끝없는 길을 걸어야죠. 어떤 사람은 몇 년이나 해야 되겠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몇 년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고, 몇 달을 해도 되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건 정해진 게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그릇에 따라서, 지혜에 따라서, 선천적인 자기의 그 착한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습을 가지고 몇 알갱이나 살겠습니까? 요 사는 동안에 세세생생을 건지느냐, 아예 그냥 구덩이에 빠지게 하느냐 하는 것은 여기에 달려 있는 겁니다. 내 한생각을 잘해서 자기뿐만 아니라 부모를 건지고 자식을 건지고 세세생생 건질 수 있으려면은, 우리가 정말 똥을 누나, 잠을 자나, 밥을 먹을 때나 주인공 생각만 나면은 항상 거기다 놓는 작업을 안 하고는 아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 내가 “삼천배를 올려라. 기도를 하라. 정성을 들여라.” 또는 “몇몇 일을 목욕재계를 하고 정성을 들여라.” 이런 말 합디까?

여러분 사는 생활이 그대로 여여하고, 그대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고, 여러분이 부처고, 여러분이 중생이니까 ‘한 생각을 잘 내면 부처고 한 생각을 못 내면 중생이다. 그러니 잘해 봐라.’ 이거죠. ‘삼보에 귀의한다’ 이런 것도 ‘자생삼보에 귀의할 줄 알아야 불(佛)·법(法)·승(僧)에 귀의할 줄도 안다. 즉 말하자면 자생중생에, 자생부처에, 자생삼보에 귀의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과거에 살던 자기와 현재의 자기 한생각과 자기 한생각의 움죽거림이 자생삼보입니다. 가만히 있는 자기 무심과, 생각을 내는 마음과, 생각을 내면 몸이 움죽거리는 것이 바로 삼합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니까 그게 자생삼보에 귀의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 자생삼보에 진짜로 귀의해서 그 도리를 알면은 바로, 불(佛)도 자기의 생명과 둘이 아니죠. 불이 생명이니까, 생명의 근본이 불이에요. 우리가 살면서 배우는 게 교(敎)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 머리 깎은 사람만 믿게끔 되는 게 불교가 아니죠. 그냥 진리예요. 그러니까 생명의 근본인 불(佛)과 한생각인 법(法)과 스님들인 승(僧), 즉 불법승이 다 한데 합쳐서 내 자생삼보와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둘이 아니죠. 생명도 둘이 아니요, 몸도 둘이 아니요, 만약에 생각도 둘이 아니라 한다면, 즉 그냥 모두가 삼보에 귀의했다 한다면, 자생이다 뭐, 부처님이다 이런 걸 떠나서, 내가 항상 얘기하죠. 여기 법당에 와서 일정례(一頂禮)를 하든지, 삼정례(三頂禮)를 하든지, 칠정례(七頂禮)를 하든지 간에 ‘내 몸은 부처님 몸과 같고, 내 마음 낸 것도 부처님 법과 같고, 또 저렇게 앉아 있는 그 모습도 내 모습과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하라고 그랬죠. 항상 그렇게 하면서, 여기 들어와서는 불상과 하나로 합치고, 나갈 때는 댁의 자신으로 한데 합쳐서 나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둘이 아니죠. 그러니 형상 부처님을 무시하지도 않게 되죠. 부처님 형상을 무시하면은 자기 형상이 무시가 되는 거니까. 모두가 그렇게 상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판단하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탄생을 안 했다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탄생을 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자랑스러운 게 있고, 즐거움이 있고, 모두 그런 거죠. 여러분이 없다면 없는 거죠. 전부 없는 거죠. 그래서 최초의 문제는 ‘너 하나로 인해서 생긴 것이다’ 하는 얘기죠. 모두 각자, 너 하나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어딨습니까?” 하니까 “말하는 놈은 어떤 놈이냐.” 이렇게 말을 했거든요. 또 “번연히 이미 부처가 됐다고 하면서도 왜 부처를 깨닫지 못합니까?” 하고 물으니까 “네가 깨닫지 못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느냐.”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그런 거와 같이 어떤 사람이든, 스님네든 스님네가 아니든 자기 그릇의 잣대에 대서 상대방을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내가 둥글게 그쪽에 모자라게 들어가 주고, 크면 큰 대로 들어가 주고 아주 작으면 작은 대로 들어가 준다면, 항상 평등하고 항상 둥글지 않겠습니까? 어때요? 여러분이 보기에 ‘왜 저렇게 할까?’ 하고 모자라게 생각되는 사람이 있죠? 그런데 ‘어허! 저게 내가 모르고 살 때의 내 모습과 같구나.’ 이런 생각 해 보셨습니까? ‘내가 모자랐을 때의 바로 그 모습이로구나!’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바로 부드럽게 말이 나가고 부드러운 행동이 나갈 겁니다. 자기이기 때문에, 전자에 모자랐던 자기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예 자기 그릇에다가 맞추어서 생각을 하고선 ‘아휴, 저거는 그냥 천리만리 모자라.’ 하고 생각을 했다면 아예 모가 나죠. 그리고 외면이 되고 그러죠. 그러니까 사랑을 할래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그러죠.

그러니 여러분이 심사숙고해서…, 그 자동적인 오신통의 제일 중심에 숙명통이라는 컴퓨터가 있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 숙명통의 컴퓨터에 스스로, 자동적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입력되는구나. 그래서 스스로 거기다가 또 맡기면 입력된 게 그냥 전체 자꾸자꾸 없어지면서 새 물로 화하는구나. 그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자꾸 화해서 없어지고 없어지고 하니까 새 걸로만 자꾸 나올 거 아닙니까, 이 세상에. 그러니 얼마나 좋은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아마 누구든지 이러한 경험 안 해 본 분들은 이렇게 좋다고, 정말 눈물까지 흘리면서 좋다고 생각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마. 그거를 알면 자동적으로, 그 무너졌다는 빌딩에 들어가다가도 아마 튀어나왔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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