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참선 공부를 해 나가야…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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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참선 공부를 해 나가야…

본문

질문

생활 참선이라는데 일상생활 하면서는 어떻게 참선 공부를 해 나가야 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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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거일동이 참선 아닌 게 없습니다. 지금은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시대에 맞추어서 우리는 참선을, “눈 하나 깜빡거리는 것도 참선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일체를 쉬어라. 놔라. 맡겨라.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감사해라. 너의 몸뚱이는 네 주인의 시자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 시자는 주인에 의해서 움죽거릴 뿐이니 너는 쉬어야 된다. 너와 더불어 모든 일체를 다 바로 쉬어라.” 하는 거죠. 그것은 종 문서를 놓지 않고는 절대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접착불에서 나와서 모든 것을 구워서 내는 데 역점이 있는 것이 참 묘하다는 얘깁니다. 우리 인간도 마음에 한번, 바깥의 일을 모두 오관을 통해서 들여 가지고선 다 여기에서 납득이 돼 가지고서 딱 설계를 하거든요. 내가 한다는 결정을 해 가지고 내지요. 이것은 구워 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생각 없이 일을 시작하진 않거든요. 그와 똑같은 문제죠. 그래서 하나를 주판을 놓을 줄 알면은 만 개도 놓을 수 있고 천 개도 놓을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없는 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질서를 지키고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날짜도 달수도 해년도 이렇게 이름을 지어 놓고 지키는 거다 이겁니다. 그것도 역시 아니라는 건 아니에요. 그것도 거기 포함된단 얘기죠. 질서를 지키는 것도 당신네 마음이요, 질서를 안 지키는 것도 당신의 마음들이니까. 그래서 잘 지키는 것만 정법이 아니고 잘 안 지키는 것이 사도가 아니고, 즉 사도나 정도가 둘이 아닌 그 하나의 근본에서 정당히 나오는 지혜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만심이 있어요. 아상이 있고. 그래서 자기를 위시하고 자기를 일으켜 세우고 자기가 했다 그러고 자기가 가졌다 그러고, 저놈 땜에 망했다 그러고, 저놈 때문에 난 살았다고 하고, 이렇게 하는 까닭에 내 진정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한번 놓고 되돌아서 나를 보는 예가 없어요. 어떠한 잘못된 점이 있어도 저쪽으로 내가 저 사람이  돼 보는 그런 여유가 있어야 할 텐데 여유가 없어요. 그냥 막바로 들어가는 거죠. “너!” 이럭하고….
 
그러니 어찌 이 한마음의 도리를 알 수 있으며 이 평등한 균형이 잡힌 이 진리를 알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천차만별로 이렇게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는 이 모래알 같은 광대무변한 도리를 어찌 한생각에 주판을 다 놓을 수가 있겠느냐? 그 한생각에는, 근본에는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근본 도리가 하나만 풀리면은 다 수학이 놔지는 거예요. 주판이 다 놔져요. 그러니 어디에 붙여도 도 아닌 게 없고, 어디에 붙여도 법 아닌 게 없고, 어디에 붙여도 진리 아닌 게 없는 겁니다. 그리고 어디에다 갖다 놔도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즐거움 아닌 게 없는 거고요.
 
그런데 우리뿐만 아니라 다 그렇겠지마는, 우리가 억겁을 거쳐 오면서 그렇게 자연으로 인해서 이것이 허망해서 쓸모가 없다고 그러지만, 만약에 이 허망한 이 시자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또 근본 내 씨가 아니었더라면 내 이 콩나무가 안 났을 겁니다. 그러니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격이죠. 콩씨가 먼저냐 콩나무가 먼저냐. 이것도 먼저가 아니고 이것도 먼저가 아닙니다. 단지 그저 이 콩나무는 콩나무대로 콩씨가 열리고 또 움죽거리지 않는 거 같으면서 움죽거린다 이겁니다. 콩나무가 말하는 거 보셨어요? 들으셨어요?
 
여러분이 내가 하는 소리를 내가 들을 줄 안다면 바로 콩나무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어떤 식물이나 동물이나, 무생물이나 유생물이나 모든 것을 다 들을 수 있어요. 돌의 말도 들을 수 있고 흙의 말도 들을 수 있어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가고 올 수 있고. 그래서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오관을 통해서 내가 부릴 줄을 알아야지 내가 오관을 통해서 내가 말린다면 아니 되느니라.” 이건 바깥으로 보고 듣고 바깥으로 돌지 말라는 소립니다.
 
그래서 예전에 한암 스님께서, 내가 그때에 스무 살도 못 될 때예요.  “스님, 얼마만큼 가면은 죽습니까? 죽으려고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아요.” 하니까, 내 몸뚱이가 죽는 줄 알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그렇게 가는데 죽어라, 죽어라, 자꾸 ‘죽어라’ 그러거든요. 이거 몸뚱이가 아주 죽어 버리라는 줄 알고 그냥 차 속에도 들어가고 막 그랬단 말입니다. 근데 안 죽어져요.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서 곧장 “스님, 얼마만치 가면 죽습니까?” 하니까 눈을 뜨고 푹 자라는 겁니다. “눈을 뜨고 푹 자야만이 죽느니라.” 그러거든요. 그거예요, 바로. 여러분이 눈을 뜨고 푹 자지 않으면은 통과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 하나하나 움죽거리고 이러는 것은, 즉 말하자면 이 전자자동기, 이게 그대로 돌아가는 거죠. 내 마음에 의해서 스위치만 눌렀다 하면은 그냥 자동기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 자동기로 돌아가는 이 자체는 우리 이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물질과 더불어 이 세상의 진리가 전부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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