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에 대한 집착 놓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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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싶은데 몸이 많이 힘들 때는 오만 가지 생각으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생사 없는 이치를 배우면서도 이렇게 나약한 자신에 속상합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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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나는 이렇게 늙을 때까지도 병이 나서 어디를 가서 어떻게 해 보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응신이라는 보살이 즉 자긴데, 자기가 자기 모습을 형성시켜 놓고 어떡할 거예요? 자기 모습을 형성시켜 놨으니까 둘이 아닌데, 자기가 몸을 움죽거리고 다니려면 몸으로도 다녀야 되고, 몸 아닌 자기로도 다녀야 되고, 갖은 각색으로 다 움죽거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잖아.’ 할 때에 그게 결국은 해결이 되는 거죠.
나는 사람들더러도 그러거든요. 어디가 아프다고 하소연을 하고 찾아오면, 당신이 이 마음의 공부를 해서 해결을 보려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아프면, 즉 자기 주인공에다가 그렇게,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하고 관하면 바로 약사보살이 돼 준다고, 즉 말하자면 일등 가는 의사가 돼 준다고 말해 줍니다. 또 좋은 데로 못 가면 ‘저 사람 좀 좋은 데로 가게 하는 것도 너뿐이잖아.’ 이렇게 하면 또 지장보살이 돼 주고 이러니까, 어느 것이든 어느 이름이든 다 될 수 있고, 이름 아닌 이름도 될 수 있고, 뭐 하나 아니 되는 게 없으니까, 그 이름은 보살이지만 부처님의 도리를 보살들이 다 하잖습니까? 용도대로 말입니다.
예전에 산으로 다니며 공부할 때 말입니다, 가야지 하고 딱 나서서 길을 걷고 있으려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길을 어디까지 걸어야 되는가.’ 그러다가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가도 없지.’ 그러면서 계속 길을 걷다가 어떤 길인지를 몰라서 발이 딱 묶였는데, ‘어떤 길로 가야 합니까.’ 하고 내면에 물으니 아주 천야만야한 낭떠러지, 천야만야한 산 두메, 길도 아닌 그냥 억새풀이 만장한 그런 곳을 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이구, 죽으나 사나 거기가 길이라니 가야지.’ 그러고 반쯤 가다 보니 억새풀에 모두 그어지고 그러니까 찢어져서 피가 나고, 날은 다 저물고 캄캄해지고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무(無)의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그랬죠. 그랬더니 웃음이 나잖아요. 그러고선 ‘아, 길은 천지가 다 길이지만 그 천지가 길이라는 걸 알고 네가 실천할 때, 구태여 나더러 묻지 않아도 된다.’ 그러는 겁니다.
우리 사는 것이 어떤 때는 좋고 평탄한 대로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주 억새풀이 빽빽한 소로, 길도 없는 길인 때도 있겠지만 그게 모두가, 깨달으면 한 걸음이고 깨닫지 못하면 천리만리인 거죠. 그래서 나는 그랬습니다.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라 그거죠. 그래도 나중에 이 스승이 가르쳐 준 그 길을 보면, 세상에 이렇게 편한 것을 가지고 그랬다고 허허 웃음도 짓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아둥바둥거리고 악착스럽게 매달려 있는 바로 그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이쪽 저쪽의 맛을 다 알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길 아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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