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재생에 대해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건전한 게시판 문화를 위하여 성격에 맞지 않는 게시물, 광고 등 유해성 글들은 관리자가 임의로 이동, 삭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질문을 올리기 전에, 게시된 글들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윤회와 재생에 대해

본문

질문

죽으면 끊임없이 사람으로나 축생으로나 자기 살아온 업대로 재생한다고 하셨는데, 그럼 돌아가신 조상님들은 벌써 이미 다시 옷을 바꿔 입고 어딘가에서 재생을 반복하셨을 텐데 이 후손들은 조상님들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느 어머니가 슬하에 외아들을 두었는데 그 외아들이 그만 죽었어요. 근데 그 어머니가 타파가 되도록 아들의 제사를 지내 주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다른 집에 가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지극하게 하시니까 좋은 데로 태어나서 사는데, 꼭 어느 날짜만 되면은 꿈에 자기가 어느 집을 찾아가서 제삿밥을 먹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깐 참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어느 집으로 찾아가서 제삿밥을 먹고 오는데, 그 집에는 하얗게 머리가 센 노파가 앉아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그러다 하루는 어느 스님이 오셨기에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바로 너를 낳아 주신 전생에서의 어머니다. 그러니까 꿈에 갔던 길을 찾아가서 그 집에 가 봐라.”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찾아서, 몇 해를 두고 항상 다녔으니까 그 길을 잘 알죠, 꿈에 다녔으니까. 그래서 찾아가니까 정말 그런 오두막집이 있는 거죠. 그래서 들어가 보니까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정말 그 노파가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현생의 자기 집에 가서 얘기를 했어요. 그러고는 그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현생의 어머니와 함께 두 어머니를 섬겼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게 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태어나서 산다 하더라도 우리가 잘 살아야 되겠죠, 사람답게. 그러니까 제사를 잘 지내드려야만 된다. 그래야만이 그 밑으로도 잘될 수가 있다 이런 겁니다. 그 어머니가 외아들이라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했으면 좋은 집에 가서 태어났겠어요. 또 자기가 과거의 어머니로서 그 자식의 현재 어머니와 같이 살았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부모가 주신 이 모습을 아주 은혜롭게 항상 생각하시고 사세요.

그래서 신도님들이 오시면 제사 잘 지내느냐는 말도 하고 천도재는 지냈느냐, 얽히고설킨 거를 다 편안하게 활연하시게 했느냐 얘기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신도님은 한쪽은 기독교를 믿고 한쪽은 불교를 믿는데 불교 믿는 식구는 한 사람이고 기독교 믿는 식구는 여러 사람이 되니까 우겨서 제사를 추도식으로 지낸대요. 근데 하나도 마음에 담기는 게 없기 때문에 조상들이 어디다가 몸을 의지하고 좋아질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한 거나 안 한 거나 마찬가지지 않겠습니까.

어떤 신도님은 다른 종교를 믿는 형제들이 추도식을 했다는데 가만히 보니까 부모의 영혼들은 가지를 않았어요. 가지 않고 여기 다니는 막내 아드님한테 따라오셨더라고요, 거길 안 가고. 참 이거 혼란스러운 일이지만 이게 사실이라는 거를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안 보인다고 무시하지 마시고, 다른 형제들이 못 지내는 형편이면 지낼 수 있는 자식이 소박하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지내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해골바가지들을 보고 정례를 올리신 겁니다. 내가 법문 중에 몇 번 얘기를 했죠? 공동묘지엘 가니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늙었더라고. 이런 걸 보면 아이도 조상이고 또 조상도 자기 자손이에요. 이런 이치를 부처님께서는 왜 해골을 가지고 가르치셨을까요? 해골과 조상이 둘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정례를 올리고 "이것이 전에 내 부모였느니라. 내 형제였느니라. 내 친구였느니라. 내 할머니였느니라. 내 할아버지였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겁니다. 죽었으면 누구든 자기 조상 아님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바다에 파도가 쳐서 거품 같은 물방울이 수만 개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라앉으면 다 바닷물인 것입니다. 이 경우 물방울은 육신을 가진 중생이고 바다는 근본 자리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물방울 하나가 가라앉는 것밖에 안 되는데, 누구라 가릴 것 없이 몸을 벗었다 하면 바다로 돌아갑니다. 죽으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땐 모두가 다 내 조상이다 이 소리죠. 일단 바닷물로 돌아가고 나면 그 바닷물의 어느 것이 내 조상인지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바닷물 전체가 다 내 조상인 거죠.

생명의 근본은 그렇게 크고 넓으면서 하나예요. 그 생명의 바다에 잔잔한 물로 그대로 한자리하고 있다가 그냥 방편으로 작게도 크게도 나투면서 한 물방울이 되어 나와서 보여지는 게 우리가 사는 겁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은 바로 이러한 것이니라. 바다를 봐라. 수만 개의 물방울이 흩어졌다가 바람이 자니 다시 가라앉아 지금은 그대로 다 바다이니라." 하시는 거죠. 그런 이치로 그 해골바가지와 뼈다귀들도 그렇게 한번 일어났다가 가라앉은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 조상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그리고 그 또한 내가 아니겠느냐 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조상님이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따로 나누어서 예배를 올린다는 게 없는 법이죠. 모든 것은 본래 한자리이기 때문에 참된 예배는 밖으로 가질 않고 안으로 드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는 곧 조상에게 하는 예배이면서 부처님께 하는 예배인 것이고, 또 동시에 나에게 하는 예배인 거예요. 그것이야말로 일체가 더불어서 함께 하는 예배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예배는 자기한테 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조상님에게 했다고 해도 맞지 않으며, 부처님한테 했다고 해도 맞지 않는다고요.
 
그것은 예컨대 돈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돈으로 물건을 사 오지만 거기엔 오고 감이 없어요. 단지 그냥 사 올 뿐이지 '돈을 저 사람에게 줬다. 그래서 물건을 받았다.' 이런 게 없는 거죠. 자연스러운 인연일 뿐이지. 그와 같이 법이란 오고 감이 없으니 그냥 '그대로'일 뿐이에요.

그래서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도 내 마음의 떡이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겁니다. 그 마음의 떡 하나에 인등이 있고, 향이 있고, 청수가 있는데 일일이 떡을 들고 다니면서 제사를 지내려니 그게 얼마나 구차해요? 그건 오히려 조상을 모독하는 겁니다. 또 부처님을 모독하는 거고요. 그건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모시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우습게 만드는 겁니다. 왜? 마음으로부터 나와 조상이, 나와 부처가 하나인 줄 안다면 그럴 수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조상님들에게 감사한 생각을 하되 늘 자기와 더불어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질 않고 거죽으로만 조상님을 공양한다면 안 되죠. 그런다면 조상님의 중생적 모습만을 보고, 조상님의 참 근본인 진실한 부처의 모습, 모습 아닌 그 모습은 못 보는 셈이지요. 그런 사람은 참된 수행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뜻으로 본다면 조상과 부처가 함께 한 그 근본 자리는 항상 채워져 있어요. 그래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몸이 춥지도 않은 그 법 안에는 법 양식이 가득가득 채워져 있거든요. 그 자리엔 언제나 충만하게 물도 있고 향도 있고 등도 있고, 일체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밝고 명랑하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참뜻으로부터 잘 정돈된다면 조상님들도 다 올바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한 집안에서 진짜 중이 한 사람만 나온다면 자손의 십 대뿐만 아니라 이십 대까지도 그 복덕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록

대한불교조계종 한마음선원(13908) 경기 안양시 만안구 경수대로 1282Tel. 031-470-3100Fax. 031-470-3116
Copyright (c) 2021 HANMAUM SEONWON. All Rights Reserved.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