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재생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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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죽으면 끊임없이 사람으로나 축생으로나 자기 살아온 업대로 재생한다고 하셨는데, 그럼 돌아가신 조상님들은 벌써 이미 다시 옷을 바꿔 입고 어딘가에서 재생을 반복하셨을 텐데 이 후손들은 조상님들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느 어머니가 슬하에 외아들을 두었는데 그 외아들이 그만 죽었어요. 근데 그 어머니가 타파가 되도록 아들의 제사를 지내 주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다른 집에 가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지극하게 하시니까 좋은 데로 태어나서 사는데, 꼭 어느 날짜만 되면은 꿈에 자기가 어느 집을 찾아가서 제삿밥을 먹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깐 참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어느 집으로 찾아가서 제삿밥을 먹고 오는데, 그 집에는 하얗게 머리가 센 노파가 앉아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그러다 하루는 어느 스님이 오셨기에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바로 너를 낳아 주신 전생에서의 어머니다. 그러니까 꿈에 갔던 길을 찾아가서 그 집에 가 봐라.”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찾아서, 몇 해를 두고 항상 다녔으니까 그 길을 잘 알죠, 꿈에 다녔으니까. 그래서 찾아가니까 정말 그런 오두막집이 있는 거죠. 그래서 들어가 보니까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정말 그 노파가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현생의 자기 집에 가서 얘기를 했어요. 그러고는 그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현생의 어머니와 함께 두 어머니를 섬겼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게 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태어나서 산다 하더라도 우리가 잘 살아야 되겠죠, 사람답게. 그러니까 제사를 잘 지내드려야만 된다. 그래야만이 그 밑으로도 잘될 수가 있다 이런 겁니다. 그 어머니가 외아들이라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했으면 좋은 집에 가서 태어났겠어요. 또 자기가 과거의 어머니로서 그 자식의 현재 어머니와 같이 살았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부모가 주신 이 모습을 아주 은혜롭게 항상 생각하시고 사세요.
그래서 신도님들이 오시면 제사 잘 지내느냐는 말도 하고 천도재는 지냈느냐, 얽히고설킨 거를 다 편안하게 활연하시게 했느냐 얘기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신도님은 한쪽은 기독교를 믿고 한쪽은 불교를 믿는데 불교 믿는 식구는 한 사람이고 기독교 믿는 식구는 여러 사람이 되니까 우겨서 제사를 추도식으로 지낸대요. 근데 하나도 마음에 담기는 게 없기 때문에 조상들이 어디다가 몸을 의지하고 좋아질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한 거나 안 한 거나 마찬가지지 않겠습니까.
어떤 신도님은 다른 종교를 믿는 형제들이 추도식을 했다는데 가만히 보니까 부모의 영혼들은 가지를 않았어요. 가지 않고 여기 다니는 막내 아드님한테 따라오셨더라고요, 거길 안 가고. 참 이거 혼란스러운 일이지만 이게 사실이라는 거를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안 보인다고 무시하지 마시고, 다른 형제들이 못 지내는 형편이면 지낼 수 있는 자식이 소박하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지내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해골바가지들을 보고 정례를 올리신 겁니다. 내가 법문 중에 몇 번 얘기를 했죠? 공동묘지엘 가니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늙었더라고. 이런 걸 보면 아이도 조상이고 또 조상도 자기 자손이에요. 이런 이치를 부처님께서는 왜 해골을 가지고 가르치셨을까요? 해골과 조상이 둘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정례를 올리고 "이것이 전에 내 부모였느니라. 내 형제였느니라. 내 친구였느니라. 내 할머니였느니라. 내 할아버지였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겁니다. 죽었으면 누구든 자기 조상 아님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바다에 파도가 쳐서 거품 같은 물방울이 수만 개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라앉으면 다 바닷물인 것입니다. 이 경우 물방울은 육신을 가진 중생이고 바다는 근본 자리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물방울 하나가 가라앉는 것밖에 안 되는데, 누구라 가릴 것 없이 몸을 벗었다 하면 바다로 돌아갑니다. 죽으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땐 모두가 다 내 조상이다 이 소리죠. 일단 바닷물로 돌아가고 나면 그 바닷물의 어느 것이 내 조상인지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바닷물 전체가 다 내 조상인 거죠.
생명의 근본은 그렇게 크고 넓으면서 하나예요. 그 생명의 바다에 잔잔한 물로 그대로 한자리하고 있다가 그냥 방편으로 작게도 크게도 나투면서 한 물방울이 되어 나와서 보여지는 게 우리가 사는 겁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은 바로 이러한 것이니라. 바다를 봐라. 수만 개의 물방울이 흩어졌다가 바람이 자니 다시 가라앉아 지금은 그대로 다 바다이니라." 하시는 거죠. 그런 이치로 그 해골바가지와 뼈다귀들도 그렇게 한번 일어났다가 가라앉은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 조상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그리고 그 또한 내가 아니겠느냐 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조상님이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따로 나누어서 예배를 올린다는 게 없는 법이죠. 모든 것은 본래 한자리이기 때문에 참된 예배는 밖으로 가질 않고 안으로 드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는 곧 조상에게 하는 예배이면서 부처님께 하는 예배인 것이고, 또 동시에 나에게 하는 예배인 거예요. 그것이야말로 일체가 더불어서 함께 하는 예배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예배는 자기한테 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조상님에게 했다고 해도 맞지 않으며, 부처님한테 했다고 해도 맞지 않는다고요.
그것은 예컨대 돈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돈으로 물건을 사 오지만 거기엔 오고 감이 없어요. 단지 그냥 사 올 뿐이지 '돈을 저 사람에게 줬다. 그래서 물건을 받았다.' 이런 게 없는 거죠. 자연스러운 인연일 뿐이지. 그와 같이 법이란 오고 감이 없으니 그냥 '그대로'일 뿐이에요.
그래서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도 내 마음의 떡이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겁니다. 그 마음의 떡 하나에 인등이 있고, 향이 있고, 청수가 있는데 일일이 떡을 들고 다니면서 제사를 지내려니 그게 얼마나 구차해요? 그건 오히려 조상을 모독하는 겁니다. 또 부처님을 모독하는 거고요. 그건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모시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우습게 만드는 겁니다. 왜? 마음으로부터 나와 조상이, 나와 부처가 하나인 줄 안다면 그럴 수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조상님들에게 감사한 생각을 하되 늘 자기와 더불어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질 않고 거죽으로만 조상님을 공양한다면 안 되죠. 그런다면 조상님의 중생적 모습만을 보고, 조상님의 참 근본인 진실한 부처의 모습, 모습 아닌 그 모습은 못 보는 셈이지요. 그런 사람은 참된 수행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뜻으로 본다면 조상과 부처가 함께 한 그 근본 자리는 항상 채워져 있어요. 그래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몸이 춥지도 않은 그 법 안에는 법 양식이 가득가득 채워져 있거든요. 그 자리엔 언제나 충만하게 물도 있고 향도 있고 등도 있고, 일체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밝고 명랑하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참뜻으로부터 잘 정돈된다면 조상님들도 다 올바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한 집안에서 진짜 중이 한 사람만 나온다면 자손의 십 대뿐만 아니라 이십 대까지도 그 복덕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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