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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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큰스님 법문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가 창살 없는 감옥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살아가고 있다는 게 정말 실감이 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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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아침 저녁 자고 깨는 것도 실감 나지만 우리가 흩어졌다가 모이는 것도 실감 나죠. 우주 자체도 그렇게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고 하는 작용을 쉴 사이 없이 하거든요. 먹고살기 위해서, 가정생활 속에서 내 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회 또는 내가 살고 있는 그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생각해 보지도 못하면서 살아나가는 수가 많습니다. 자기 죽을 날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죽을 날은 생각지 않죠.
요새 난 ‘여러분이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부자유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거를 생각할 때 너무나 딱해서 기가 막힐 때가 많아요. 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창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창살 속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면서 구속을 받고 살고 있나.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폭넓게 생각을 해 보십시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체 천차만별의 사생들, 그 모두가 어떻게 살고 있나. 천차만별의 사생들이 모두 자기가 살아온 습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왜 벗어나지 못할까요?
한 가지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연어인가, 은어인가? 하여튼, 왜 그것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떠나서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서는, 자기 모습을 형성해 놓고 자기는 없어지는 그러한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쉴 사이 없이 하게 될까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우리의 모습들로 인해 먹히고 먹고 살아온 그 습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습이 쉴 사이 없이 반복되는 반면에 누적이 되고 누적이 되고 그래서, 하여튼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한 번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 그대로만 따라갈까요? 그대로 따라가더라도 우리 마음은 발전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마음의 발전이 있어야만이 우리의 삶도 발전이 생기고, 또는 발전이 생기는 반면에 창조력이 생기고, 창조력이 생기면 물리가 터지고, 물리가 터지면 지혜로워지죠, 마음이 넓어지고. 그래서 우주 천지를 곳곳마다 심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죠.
그렇다면 어떻게 넓게 봐야 하나? 첫째, 우리가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 사실만 알아도 그것은 아주 폭넓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알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고 했죠. 항상 얘기하는 것처럼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한 찰나에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다. 삼천 년 전을 지금 현재에 일 초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미래를 일 초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못을 박아서 ‘미래의 어느 때에 이렇게 갖다 놓을 수 있다’ 이런 게 아니고, 시공을 초월해서 멀고 가까움이 없이, 또 가고 옴이 없이 자유롭게 가고 옴을 말하는 거죠.
이 모든 도력이 어디서 생기나? 마음이 폭넓고, 폭넓은 그 무리들이 사는 그 가운데에 바로 나도 더불어 함께 한마음으로 지금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를 형성시킨 놈이 어떤 놈인가? 내가 나를 형성시켜서 지금 끌고 다니는데, 물론 혼자는 할 수 없어서 어느 부부를 등장시켜서, 정자 난자를 빌리고 몸을 빌려서 형성시키는 겁니다. 벌레가 나무를 의지해서 자기 몸뚱이를 붙들어 매서 진화를 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기대지 않고는 못 살아요. 그래서 항상 여러분한테 해 드리는 말이 ‘공생, 공심,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먼 데로 가서 공부를 하겠다,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겠다, 홀로이 앉아서 공부를 하겠다 이런 것은 아주 어긋나는 일이죠.
어떤 선지식께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죠. “분주하고 시끄러워서 저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서 토굴을 묻고 살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러면 너는 지금 곧바로 가되 길을 딛지 말고, 남이 짜 준 옷을 입지 말고, 남이 농사지은 밥을 먹지 말고, 남의 물을 먹지 말고 남의 땅에다가 오줌도 누지 말라. 그리고 남이 농사지어서 지붕을 만든 건데 그 지붕 밑에서 어떻게 자느냐? 남들이 다 해 놓은 데서 너도 더불어 같이 살면서, 더불어 같이 사는 너의 모습과 너의 생명과 너의 아픔을 다 버리고 무슨 공부를 한다고 하느냐!”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그때서야 알고 ‘어허, 이게 모두가 한도량이구나!’ 하고 가는 바도 없고 오는 바도 없이 공부를 했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이걸 말로 꼬집어서 어떻게 다 하리까? 말로 해서 마음이 승화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말로 꼬집어서 다 할 수가 없어요. 비밀문서라는 것이 정신세계의 비밀이니까요, 전부. 우리가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도 비밀이거든요. 예전에는 모습을 가지고 축지법을 했지만 정신계의 축지법이 지금 시점에는 필요하니까요. 지금은 정신을 먹고 살고, 정신을 잡아먹느냐 정신을 뺏기느냐 하는 문제들의 싸움이라고요. 지금 구순히 사는 것 같지만 전체가 전부 싸우고 있는 거죠. 이런 싸움을 안 하고 어떻게 평등하게 공법으로 대치를 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두가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형상 아님이 없는데 모든 거를 밟고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법은 없을까? 그래서 삼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 그 뜻을 일러 주셨고 지금까지도 일러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도리를 깨달았다 해도 각각 있는 게 아니에요. 이 도리를 자세히 들으세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무리 많이 마음을 통해서 들어와도 두드러지지 않고, 여러 부처님들의 마음이 여기를 통해서 바닷물 내놓듯이 다 내놔져도 줄지 않아요. 이렇게 광대무변하고 묘한 도리가 우리들에게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도 관습의 습에, 인연줄에 매달려서 그냥 꼼짝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한 식구, 부부, 자식이다 할지라도 그 자식들의, 부부의 몸을 붙들고 매달리지 말고, 만약에 그 마음을 둘 아니게 놓고 슬기롭게 굴린다면 몸은 저절로 붙들어지고, 사랑은 저절로 화해서 자비의 정이 되어서 뗄래야 뗄 수 없이 이어져 가면서 더불어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묘법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어떡하면 요것을 요리를 잘해서 잘 먹여서 그 맛을 알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무지 쉽지가 않고 땀이 부쩍부쩍 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지구에 붙어서 사는 사람 벌레는 화해서 한 발을 떼어 놔야만이 이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래야만이 자유자재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이 내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는 평등봉에 같이 한자리를 할 수 있어서 여래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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