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봤는데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건전한 게시판 문화를 위하여 성격에 맞지 않는 게시물, 광고 등 유해성 글들은 관리자가 임의로 이동, 삭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질문을 올리기 전에, 게시된 글들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봤는데

본문

질문

부끄럽지만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요즘 자주 부부싸움이 일어나고 되는 일도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보러 갔더니 삼재가 들어서 그렇답니다. 괜히 갔다 후회하면서도 자꾸 걸리게 됩니다. 이 모자란 중생이 그래도 마음의 중심 잡고 갈 수 있도록 호되게 꾸짖어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본원관리자님의 댓글

본원관리자 작성일

이 공부하는 데는 좋은 거든지 나쁜 거든지 안 되는 거든지 되는 거든지, 되는 것은 감사하게 놓고, 겸손하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대로 믿고 놔라. 패기가 없다면 믿는 것이 다 무효로 돌아갈 수도 있고, 바깥으로 믿는다면 허황된 미신에 불과합니다. 안으로 믿고 안으로 굴릴 수 있고 도도하게 패기를 가지면서 언제나 겉으로는 겸손하게 굴려야 된다 이거죠. 그렇다고 마음이 떳떳하다고 해서 나를 세우는 떳떳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은 이사를 가는데 북쪽으로 삼살방이 들어서 계약은 해 놓고 못 갔다는 분도 있습니다. 처음 오는 분들이 그러겠지마는 삼살방으로 가면 집안이 잘 안되니까 죽는다고 누가 그랬답니다. 또 어떤 분은 “삼살방이 들기 이전에 이사를 가면 가환이 떠나질 않는다. 너는 내년에 꼭 죽을 사주팔자고 삼재가 들었으니까 잘못될 거다. 그러니까 조심해라.” 이런 말을 들었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약했으면 자기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토록 애를 쓰고 고귀한 자기의 생명을 그렇게 형성시켜 가지고 이렇게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어쭙잖은 말에 흔들리고, 거기에 따라서 자기가 자기로 살지 못하고선 남의 말에 그냥 휘휘휘휘 돌아가느냐 이겁니다. 그건 그런 사람들의 노예지 자신이 사는 참사람이 못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날에 가난을 면치 못하고 우환을 면치 못하고 생사윤회를 면치 못하고 끄달리기에 급급하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넓어질 수도 없고 물리가 터질 수도 없죠. 집안은 가난하고 항상 오락가락 융합이 되지 않고 한마음으로 돌아가질 않고, 자식은 자식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친척은 친척대로 돌아가는 이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모든 거는 자기가 지어 놓고 자기가 받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어느 사람이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오면 아무거나 팽개치고 마누라 때리는 습관이 있어서 술만 먹었다 하면 자기 세상이야. 또 그뿐인가. 농사를 짓느라고 소를 기르는데 소한테도 그냥 우악해요. 그래서 소도 질색을 하는 거죠. 한번 부렸다만 하면 소 몸뚱이가 뭐 쳐 놓은 거 같아, 멍이 들어서. 아내가 아침에 쇠죽을 쑤어 주면서 보면 그게 가시질 않는 거예요.

자기도 그러한 경험을 하고 그런 아픔을 겪기 때문에 소가 그렇게 겪는 걸 보니 소하고 마음이 항상 통하는 거예요. 소더러 하는 소리가 “너나 나나 얼마나 죄가 많기에 저런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맞아야만 할꼬.” 이렇게 울어야만 했고 “그렇다고 해서 살지 않을 수도 없고 어떡하면 좋으냐?” 하면서 쇠죽을 쑤어 주면서 같이 운 예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것이 마음에 잠재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죽어서 바로 남편이 되고, 그 남편은 여자가 돼 버렸어요. 소는 그 집의 아들이 돼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횡포를 부렸던 남자는 이제 부인이 됐는데, 아들은 아버지하고는 잘 맞는데 어머니하고는 도대체 맞지 않는 겁니다.

이거를 누가 알겠습니까? 전자에 자기가 그랬다는 거를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이건 자연의 법칙이면서 자기의 잠재의식에 들어 있던 거기 때문입니다. 자기 잠재의식에 항상 잠재해 있고 그게 아파서 울었기 때문에 그것이 없어지질 않고 지워지질 않아서 문제는 일어난 겁니다. 만약에 진짜 그 도리를 지금 공부하면서 알았다면 그것조차 지워 버릴 것을, 그래서 또다시 인연을 짓지 말 것을….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그거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저 사람한테 저렇게 맞아야 하고, 밥 세 끼니 얻어먹는 건 마찬가지건만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때에 따라서는 주정을 받아야 하고 맞아야 하고 애들도 꼼짝 못 하고 이렇게 모두 살아야 하나. 이런 인생은 살아 뭣 하나.’ 하고 양잿물을 갖다 놓고 몇 번 죽으려고도 했지만, 그것이 바로 잠재해 있기 때문에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연이 돼 가지곤 거기에 또 뭉쳐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 가지고 그 아들은 “아버지, 오늘 얼마나 수고 많으셨습니까?” 하면서 그렇게 둘은 깔깔대고 웃고 그러는데, 소외당하는 부인은 바깥에서 들으면 그냥 화가 치밀어. 그리고 때에 따라서 남편이 들어오면 막 그냥 자기를 때리고 그러거든요. 아들도 들어와서는 괜히 투정을 하고 괜히 심통을 부리고 팽개치고 나가고, 그렇게 어머니를 못살게 굴 수가 없어요. 

그랬는데 그 부인이 하루는 너무 괴로워서 절에 갔어요. 절에 가서 그런 사실 얘기를 좌악 하면서 슬피 울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스님이 하는 소리가 당신은 예전에 남편이었고 당신 지금 남편이 당신의 부인이었을 때 몇 곱쟁이 때렸고, 지금 아들인 소를 몇 곱쟁이 때렸어. 그렇게 아프게 때렸고 못 살게 한 그 인연으로 인해서 오늘날에 당신이 이렇게 맞는 거고, 속상하고 불이 일어나고 살 수가 없고 구박을 받는데 아직 백분지 일도 받지를 못했다 이거야. 그러니 저 사람하고 인연이 돼 가지고 세 번을 다시 죽었다 태어나야 다 갚는다는 거라. 이건 정말 너무했죠? 

그랬는데 그 소릴 듣고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세 번 인연을 안 맺고 그 고생을 안 합니까?” 하면서 믿고 기댔습니다, 그 스님한테. “면할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소리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안의 자부처를 찾으면서 ‘모든 것은 내 탓이니 그저 모든 것을 당신께서, 제가 열 번을 죽어도 할 말이 없으니 열 번을 죽는다 하더라도 감수하고 받겠습니다.’ 하고선 내 탓으로 돌리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름만 달랐다 뿐이지 주인공에 다 맡기라는 얘기죠.

그리고 아들이 그러더라도 맡기고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탓을 하지 말고 한 번 때리걸랑 더 때려 달라는 식으로다가 그저 존경하고 섬겨라. 그런다면 세 번 죽어서 다시 인연이 돼서 그렇게 고통을 받을 것이 당대에 없어질 수도 있다. 자꾸 그렇게 해서 네 스스로서 마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당대뿐만 아니라 그냥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답니다.

그러한 말을 듣고선 그때서부터 지금 우리가 공부하듯이 때려도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맞고, 아들이 팽개치고 해도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속으로 염원을 하고, 먹을 걸 갖다 주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나가서 사 먹고 들어와도 ‘그저 감사합니다.’ 항상 이렇게 감사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석 달이 못 가서 아들과 남편이 차츰차츰 착해지더랍니다. 그래서 스님한테 가서 말씀을 드리니까 “네가 그렇게 때린 업이 녹느라고 그러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그러니 누가 갖다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지도 못합니다. 당신네들이 지어 놓은 것들은 당신네들이 그렇게 녹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하는 분들은 누가 어떠한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보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나 가기도 바쁜데 왜 거길 보느냐 이겁니다. 왜 거길 봅니까? 그거부터 배워야지, 만약에 그거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이건 만날 작은 그릇에 엎드러져서 그 그릇에서 만날 헤어나질 못해요. 그게 습이에요. 그래서 잘못되는 거를 그대로 ‘보지 마라’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보면서 보지 말고 안에다 놔 버려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잘못된 물건은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물건을 생산을 해서 내도록 자비를 가져라 이 소립니다. 물건이 잘못되고 녹이 슬었으면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좀 더 좋게 해서 내면 좋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 거기다 넣으면 언젠가는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오게 될 수 있는 그 기간이 있을 거다 이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걸 참지 못해서 “이거는 이 접시의 쪽이 떨어졌어!” 이럭하면서 말을 하게 된다 이겁니다. 쪽이 떨어졌으면 쪽이 안 떨어지게 용광로에 넣어라 이겁니다.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금 쪽이 안 떨어진 것이 나오도록만 용광로에 넣고 말로 하지 말라 이겁니다.

왜? 지금 내가 바빠서 죽겠는데, 지금 다시 자꾸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생산을 해내야 될 텐데, 생산하는 거는 나중이라도 자꾸 넣어야 될 텐데, 그러면 스스로 넣게 되면 스스로 용광로에서 새로 또 발견이 되면 ‘아, 그때는 그렇더니 새로이 이게 나오는구나!’ 또 달리 보일 때가 있고 달리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겁니다. 물건이 다르니까, 달라졌으니까.

그러니까 고정되지 않다는 얘깁니다. 고정되게만 보지 말라 이거예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달라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행을 하고 고정된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한 가지를 보고 고정되게 말을 집어낼 수 있겠습니까. 내일 다르고 모레 다르고 일 년 후에 다르고 몇 달 후에 달라질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그러니 얽히고설켜서 돌아가는 그 인연을 어떻게 끊어야만 하겠습니까? 이거는 물질로도 안 되고 돈으로도 안 됩니다. 마음으로써 지은 거니까 마음으로써 녹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공부를 해라, 기복으로 나가지 말라, 바깥에서 이름을 찾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목록

대한불교조계종 한마음선원(13908) 경기 안양시 만안구 경수대로 1282Tel. 031-470-3100Fax. 031-470-3116
Copyright (c) 2021 HANMAUM SEONWON. All Rights Reserved.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