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걸림 없이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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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음으로는 마음공부를 하여 마음에 걸림 없는 멋진 삶을 살고 싶은데 현실의 내 모습은 너무도 찌질하게 여기 걸리고 저기 걸리고 걸리는 게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은 좀 자신이 없고 다음 생은 참수행자로서 열심히 정진하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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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 중생들은 생각 자체, 자기를 지키지 못해요. 자기를 지키기 못하기 때문에 행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모든 것이 방황하게 되고, 들어오면 나갈 줄 모르고 나가면 들어올 줄도 모르죠. 자기 마음의 부처가 자기 육신의 중생에 이익을 줄 수 있어야 남에 육신에도 이익을 줄 수 있고 마음도 싱그럽게 오고 감이 없이 서로 통하게 되어 에너지와 같이 이렇게 통해서 모두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이치가 됨으로써 그 한 눈에 우주가 밝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살아나가는 데에 마음을 한군데…. 자기가 공했기 때문에 마음조차 공했고 마음이 공했기 때문에 세상이 공했고 세상이 공하기 때문에 우주 전체가 다 공한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하루하루 24시간 살아나가는 동안에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자기를 자기가 해하는지 모릅니다. 지금만, 우리가 살아나가는 요 동안만 헤쳐진다면 또 별문젠데 그렇지 않거든요. 자기가 헤치고 살던 그 습이 세세생생에 돌아가서 자기를 가두고 자기를 묶고 자기를 구덩이에 빠트리고, 이렇게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서 아프다고 우는 그러한 참혹한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니에요.
옛날에 어느 고승이 열반을 하셨는데 열반을 하셨어도 생시에처럼 보신들이 모시고서 수레를 타고 가시는데 어디쯤 가다 보니까 한 캄캄한 암흑 구덩이에서 마구 춥다고 떨고 아우성을 치는 소리는 나는데 그 사람네들은 눈도 귀도 뜨지 못해서 그 암흑 속에서 한 발자국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다 보니까는 그것들이 불쌍하니까 한 번 숨 들이쉬는 데 고만 그 업보가, 인과가 다 무너지고 다 녹아 버렸다 이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불에 타 버렸다 이거예요.
또 어디쯤 가다가 또 한생각이 들기를 ‘아, 그것이 녹아 버렸다면 또 여기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고개 돌려 보니 캄캄한 암흑 구덩이에 빠져서 모두 말 한마디 잘못해서 허우적거리고 울면서 “스님! 스님을 뵙기는 할 수 있는데 이 말 한마디 잘못한 거에 걸려서 이렇게 캄캄한 암흑 구덩이에 빠져서 허덕입니다. 그러니 제가 물을 때에 꼭 대답 한마디만 해 주시고 가십시오.” 하거든요. 전자에 어느 스님들께서 근기가 약하든 근기가 있든 여러분들이 오시는 대로, 거지가 오든 마다 안 하시고 설해 주신 그 뜻을 우리는 참 잘 받아들일 수 있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백 생 여우의 몸을 가지고 그렇게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그렇게 야호라고 한 뜻이 바로 암흑 구덩이라.
그러니 그러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이 구덩이에서도 수많은 중생들이 거기에 그렇게 걸려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인과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매한 것도 아니니라. 네 한생각이 그 도리를 알면은 밝아질 수 있느니라.” 하니까 홀연히 그 자리에서 깨쳐서 그 모습을 벗고 승천을 했다 합니다.
그 한 번 숨 내쉬는 데는 두루 중생들에게 모든 그 마음과 마음을 통해서 오고 감이 없이 통하는 마음으로서 밝아지니 나와 남이 없이, 나 아님이 없는 그 유생 무생들이 다 밝아져서 스스로서 깨치고 스스로서 개발을 하고 스스로서 국적이 잘되고 스스로서 세계가 좀 더 질이 높아지고, 이렇게 되면 사람사람이 자기가 연구를 하게 되고 개발하게 되고 창조하게 되고, 세세생생에 끄달리지 않게끔 되는 이치가 바로 내 마음이 그렇게 밝아야 된다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든지 지금 살아나가는 데 이게 그르다 하면 그른 데로 쏠리고, 이게 옳다 하면 옳은 데로 쏠리고, 학이다 하면 ‘이건 도가 아니다’ 이렇게 끌리고, ‘이거는 도다’ 하면 이건 도로 끌리고, 이렇게 해서는 도와 학, 생활 이 모두가 천차만별로 된 것이 한데 뭉칠 수도 없거니와 그 한데 뭉쳐 있는 거조차도 놓을 수가 없어요. 저 강물이 저렇게 당당하고 도도하게 흐르듯이 그 물에서 파도가 일고 그 물에서 도도하게 저렇게 시퍼렇게 흐르듯이 이 세상에 한번 나왔다면 그냥 갈 수는 없잖습니까!
우리가 만법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만법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살아나가면서 여기에 걸리고 저기에 걸리고, 이것을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사람이 살아나가자면 벌어서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길러야 하고, 윗분들은 섬겨야 하고 아랫사람들은 길러야 하고, 묵은 빚 갚으랴 햇빛 주랴 이건 살기가 거듭거듭 죽겠는데 거기에다가 덧붙여서 이루종차 헤아릴 수 없이 붙여서 걸려 돌아가니 사람 살맛이 나겠습니까?
살맛도 안 나려니와 세세생생에 그렇게 끄달리고 또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등장을 할까?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배역을 하러 나올까? 머슴으로 나올까, 대관으로 나올까? 토끼로 나올까, 뱀으로 나올까? 이 모습으로 가지고 나올 건 누가 상상도 못 해요. 그건 자기 마음에 달린 겁니다.
어느 사람이 부처님 앞에 가서 고하기를 “저는 이 세상에 나와서 나쁜 일은 안 하고 좋은 일만 했고 배고픈 사람 밥 줬고 옷 없는 사람 옷 줬고 모든 일을 이렇게 좋게 했거늘, 왜 이렇게 가난하며 가환은 이렇게 많습니까?”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너는 이날까지 했어도, 지금만 한 게 아니라 거듭거듭 해 나왔어도 공덕이 하나도 없느니라.”
여러분! 똑똑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혼자 살았던가요? 언제 식구가 있었던가요? 언제 자식이 있었고 부모가 있었던가요? 언제 친척이 있었던가요? 이 세상 천지만물이 나기 이전 나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같이 이렇게 모여서 살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하는 이 식구들은 여러분들이 마음 쓰는 대로 깡통끼리 모이고 무쇠끼리 모이고 이렇게, 항상 내가 말하죠? 이것이 천차만별로 돼 있는 이 차원을 어떻게 다 말을 하리까.
이 중세계에 이름 모를 것들이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지금 앉아 계신 여러분들의 육신 안에, 바로 오장육부 안에 있는 바로 그 생명들의 이름조차도 여러분들이 헤아릴 수 없을 겁니다. 내부에 있는 것도 모르는데 외부에 있는 그 이름 모를 것들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데 생명들은 또 어쩝니까?
우리는 이렇게 지금 직결돼 있는 현실에 나와 모두 다 있는데 우리가 먹고 같이 연쇄적으로 생명이 살아나가는 것도, 또 모습을 가지고 나오는 것도, 먹고사는 것도 모두가 한마음으로서 공생, 공용, 공체, 공식, 이 모두가 공 자리, 이 모두가 이러한 것이에요. 그런데도 내가 했고 내가 줬고 내가 잘했고 이렇게 하면서도 쪼끔만 잘못하면 저건 저 사람이 했고 저 사람이 했고…. 원망, 증오, 또 잘한 것도 저 사람이 잘했다고 이렇게 하거든요. 모두가 둘로 두니 이 노릇을 앞으로 어찌할까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살아나오는 그 습에 의해서 모든 생명들이 한 생각 잘못하면 수억만 개가 잘못된 생각으로써 생명들이 이렇게 소생이 되지만, 잘 생각을 했다면, 한 번 잘 생각하는 반면에 죄 하나도 없이 타 버릴 수 있고 또 생명이 좋게 태어나서 모든 만사 만생을 다 건질 수도 있는 모습을 가지고 나오실 수도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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