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파도 관을 하면…
본문
질문
저는 몸이 많이 아파도 관을 하면 아픔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몇 번 체험을 했었는데 요번에는 관을 해도 소용이 없어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제가 간절히 관하지 않은 탓일까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여러분이 가정에서 이러니저러니, “나는 주인공을 찾는데도 이렇게 안 됩니다.”, “주인공을 찾았더니 잘되다가 또 안됩니다.” 이러거든요. 여러분이 한 발짝 떼어 놓는 것만 알았지 한 발짝 또 놓고 드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한 발짝을 들었으면 한 발짝은 놓고 한 발짝 들었으면 한 발짝 놓고, 이게 정상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안 되는 것도 알아야, 드는 것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니라 놓는 것도 알아야, 들고 놓고 들고 놓고 하는 작용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그런 창조력을 기를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을 찾으니까 어느 만큼 되더니 안 되더라고 합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도 알아야지 전진하기만 하면 빠져 죽죠? 때에 따라서는 전진하기만 하면 구덩이에 빠질 텐데 그때는 물러서야 빠져 죽지 않죠? 그러니 드는 것도 법, 들지 않는 것도 법. 그래서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니라.” 한 것입니다.
왜 안 되는 것도 법이라고 했느냐? 구덩이에 빠지겠으니까 빠질 일은 물러서야 한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 물러서서 다시 굴려서 놓으면 빠지지 않을 데로 갈 수가 있으니까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라 했습니다. 이거를 지혜롭게 잘 굴릴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생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가정에서 몸만 아파서 아픈 게 아니라 천차만별로 아픔을 가지고 가는데 바로 그 아픔이라는 재료가 지금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공부 길에 들어선 걸 뜻합니다. 그냥 맨손으로 들어설 수가 없으니까 그 재료를 가지고 들어선 겁니다. 그 재료가 아니면은 이 길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살지.’ 하는 마음이면 이 길을 들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 모든 것은 공했다고 했습니다. 수없이 얘길 하지만 프로펠러가 돌아가는데, 그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거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습니까? 네? 먼지 앉을 새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병이 났다 하고, 여러 가지 아픔이 생겼다 합니다. 내가 이런 걸 당했다, 내가 가졌다, 내가 병났다, 모두가 ‘내가’입니다, 내가! 내가 공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간다고 했죠. 여러분이 그걸 짐작하시죠? 고정됨이 없이 보고 듣고 행하고 말하고 만나고 먹고, 고정됨이 없이 말입니다. 그랬으니까 우리가 한시 반시도 그냥 고정되게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변하고 부서지고 모든 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겠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모두 ‘내가,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가 아니라 전체 포함해서 돌아가는 길에 그런 것이 마음에 따라서 부딪치게 되고, 그 업식으로 인해서, 인연에 따라서 업식이 돼서 나한테 자꾸 연관이 되는 거니까 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걸, 내 몸속에 들어서 자꾸 그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 것을 말입니다, 업식이라고 하고 업보라고 하고 유전이라고 하고 영계성이라고 하고 이런 거를 다, ‘아픔이 아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모습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나한테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생긴 거다. 업보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병고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를 나한테 이렇게 감사하게도 준 것이다. 이끌어 주는 재료가 주어진 거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재료를 가지고 나는 관찰하고 거기다가, 내 마음의 주인한테다 맡겨 놓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지켜보고 체험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냥 틀고 앉아서 ‘이게 뭣고?’라든가, 의정을 강제로 내 가지고 한다든가 이런다면은 그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하나하나 지켜보고 체험하고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일체 만법의 근원이며 그 근본을 해탈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그냥 “나는 주인공을 찾았는데도 이렇습니다.” 하지 말고, 찾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겁니다. 본래 있는 거니까. 본래 없는 것을 찾는 것이라야 이게 문제가 되지만 여러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거를 발견하는 겁니다. 즉 암흑 속에서 밝음이 불끈 솟아서 불이 일어나면 모두가 밝게 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말로 이러고 저러고 이러고 저러고, 이 병원을 가 봐야 옳을까, 여길 가 봐야 옳을까 저길 가 봐야 옳을까 이러지 마시고, 내 중심에서 ‘이거는 병원을 좀 갔다 와야 되겠다.’ 한다면 그대로 가는 것도 법이고, ‘병원엘 안 가도 이 한마음 속에 이 모든 생명들이 한마음으로 작용을 해 주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이 들면 그대로 거기다 놓고 실험을 하고 지켜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지, 내 속에 들어 있는 의식의 그 마음들과. 여러분이 따지고 보면 하나가 아니죠? 이 속에 든 수십억의 그 모습들이 다 여러분의 모습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여러 가지의 모습들이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해 주는 바람에 여러분이 걸어 다니고 말도 하고 나라고 그러기도 하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나를 보러 오더라도 나에게 말을 해서 해결을 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내 이 마음에다, 모두 한마음에다 넣고 ‘저 마음도 더불어 같이 한마음인데 어찌 스님의 마음인들 이 속에 아니 계시랴. 일체 만법이, 또는 만인의 마음이, 또는 일체제불의 마음이 다, 내가 아파서 응해 달라고 하는데 어찌 응하지 않으랴.’ 그렇게 믿고 마음으로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다면 모두가 응신이 돼서 약사가 돼 가지고 여러분의 병을, 몸에 들어 있는 여러 의식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 돼서 고쳐 주시고, 어떠한 애로가 있다면 관세음이 돼 주시고 명이 짧다면 칠성이 돼 주시고, 응신으로 찰나에 드셨다 나시고 드셨다 나시고, 그리고 좋은 데로 못 간다 한다면, 그래서 좋은 데로 가게 해 달라고 이렇게 정성을 지극하게 한다면 바로 지장이 돼서 여러분의 그 의식과 더불어 한데 합쳐서 그 지옥문을 다 허물어뜨리고 나가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료한 마음의 슬기로운 그 묘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바깥으로 그렇게 끄달리고 그런다면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하며 어떻게 모든 것에서, 그 암흑 속에서 벗어나서 이 태양을 다 보고 행하시렵니까?
- 이전글생활 선의 이치에 대해 25.07.16
- 다음글너무 힘든 인연을 만났는데 25.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