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보다 못한 삶을 사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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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는 세상이 불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을 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업을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그래도 가끔 이해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현실을 보면 동물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웬만한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견공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 업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떤 스님이 신도 몇 명과 정신지체자 수용소를 방문했답니다. 그런데 스님에게만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특별한 방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정신지체자들에도 급이 있어서 가장 낮은 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지내는 곳이었는데 마치 감옥 같은 곳에 갇혀서 자기 몸도 스스로 잘 가누지 못한 채 뒹굴고 있더랍니다. 청소는 수용소 안에 호스를 대서 물을 뿌려대는 식으로 하루 2차례 해주고 있었으며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집에는 기르는 애완견이 한 마리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호강하지는 않지만 가족 모두가 귀여워 해주며 때로 산책도 시켜주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지요. 이 두 경우를 보았을 때 과연 전자가 사람이라서 후자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짐승들의 생활이나 사람들의 생활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용도가 다르고 생활 자체의 문제가 달라서 그렇지 사는 거는 아마 매 일반일 겁니다. 자식이 부모를 따라서 살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도 버리는 연어도 있듯이 말입니다. 개미 종류도 여러 가지인데 알을 낳아서 죄 벽에다 매달아 놓는 개미도 있습니다. 마구 돌아다니다가 그 알이 채일까봐 잘 두려고 하는 걸 보면 자식을 위하는 거는 아마 사람이나 짐승이나 같을 것입니다.
인간의 차원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리가 없는 사람, 곱사가 된 사람, 눈이 부실한 사람, 팔이 없는 사람, 또는 병고로 반생을 앓는 사람, 한 생전을 앓는 사람, 또 반생을 가난으로 이어가는 사람, 별의 별 사람이 다 많은데…. 우리가 사생(四生), 사생하는데 사생을 어떤 의미에서 사생이라고 합니까.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생이라는 뜻을 똑바로 아시고 그 사생의 천차만별의 문제들을 자신들이 잘 직감하고 행동으로 취해나가야만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생이라는 것은 태로 낳는 거나, 알로 낳는 거나, 화해서 낳는 거나, 질척한 데서 낳는 것을 말하는데, 습한 데 사는 생명들도 천차만별이고 알로 낳아서 사는 생명들도 천차만별이고 또 화해서 사는 생명들도 천차만별이고 태로 낳아서 사는 생명들도 천차만별이란 말입니다. 그 천차만별 가운데 영혼이 깨끗하고 밝고 정갈하게 사는 영혼들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의 영원한 자기의 근본 불성 자체가 바로 자기를 이끌어 가는 건데, 그 불성을 말하기 이전에 영혼이라는 그 자체가 깨끗해야 되는데 깨끗치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육신이 튼튼하고 정상이며 불구가 아닌 분들도 영혼이 아주 불구인 분이 있고, 몸은 불구이나 영혼은 아주 건강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과거로부터 우리가 불구로 나오는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불구로 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 불구가 된 자체로 인해서 어떠한 문제가 닥치면 눈물을 흘리면서 뼈저리게 울면서도 자기가 불구이기 때문에 보는 것도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제일 밑에 섰기 때문이죠. 자기가 위가 됐으면 잘 보질 못할 텐데 밑에서 보기 때문에 판단을 잘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육신이 멀쩡한 분들 중에도 마음이 불구가 돼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절룩발이인 분들이 많거든요. 그건 모습이 그런 게 아니라 마음 자체가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아주 불구죠. 그래서 따지고 본다면 육신이 불구라고 해서 영혼도 불구냐, 육신은 멀쩡한 사람들이 영혼이 불구가 된 사람들이 많으냐를 비유해 볼 때에 몸이 불구인 사람일수록 영혼은 더 깨끗한 경우가 많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 깨끗한 영혼으로 인해서 우리가 차원에 따라서 모습이 주어지고 삶이 주어지고 또 복도 주어지는 것인데 영혼을 그렇게 불구로 만든다면 지금 불구로 사는 사람들보다도 더 형편없이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침착하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죠. 우리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사생들이 다 그래요. 날아다니는 새들도, 육지에서 사는 짐승들도, 물에서 사는 고기들도 또 질척한 땅에서 사는 생명들도 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마음 공부를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마음을 똑바로 가지고…. 누가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이럭하지도 말고 저럭하지도 말라는 게 아닙니다. 누가 또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 사랑을 하되 자비로 해라. 여북하면 자비에 ''비'' 자를 무슨 ''비'' 자를 썼습니까? 슬플 ''비'' 자를 썼죠? 가엾어서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가엾어서 내가 너를 건지겠노라. 너를 건지는 데 내가 네가 돼주마. 이 마음이 마음속에 들어가 주지 않는다면 건져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선 사생자부라고 그랬습니다. 일대사의 인연을, 그 사생인연을 다 맺어서 그렇게 인연을 해놨기 때문에, 둘이 아닌 까닭에 자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 사생들의 과정을 면밀하게 다 보고 살죠, 지금은 밝은 세상이니까. 사생들의 모습이 어떻게 살고 있나, 또 우리들의 삶이 어떠한가. 차원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다 뿐이지 삶의 과정은 다 똑같습니다. 생명도 둘이 아니요, 마음도 둘이 아니요, 부모 자식이 돼서 형제가 돼서 사는 것도 또 둘이 아니죠. 애통해 하고 자기는 껍데기가 돼도 자식을 위하여 다 주는 것도 똑같고요. 그러나 법의 부모는, 우리 모두 다 법의 부모를 가지고 계십니다. 불성이라는 것이 법의 부모입니다. 왜냐하면 수 억겁으로부터 진화해서 형성시켜 나온 장본인이니까요. 이 모습이라는 건 한철 살다가 망가지면은 다시 바꾸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바꾸어지죠.
오늘 아무렇게나 살다 뭐 죽으면 고만이지 이러지마는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자기 각자 하나만 잘못되면 좋은데 그게 아닙니다. 하나가 잘못되면 단추 잘못 끼우는 거와 같아서 죽 내려가면서 다 잘못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 한 분이라도 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야합니다. 모두이면 더더욱 좋구요.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데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 많이 생깁니까. 그냥 편안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부모를 두고 자식이 그냥 별안간에 죽거나 부모도 자식들을 두고서 별안간에 죽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짐승들도 그렇게 해놓고 자식이 못 잊어서 그 죽은 자리에 몇번이고 가서 울고 그럽니다. 그게 사람과 뭐이 다릅니까? 그러니까 그런 불쌍한 분들을 보거나 생각이 나도 불쌍하게 생각지 마세요. 그냥 주인공에다 탁 맡기세요. 그래야 그 사람들도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그것이 내 마음에 서로가 구제하는 길이요, 자비성이요, 얄팍한 사랑이 아니고 자비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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