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118_1991년 2월 3일 자유인이 되는 길
본문
질문자1(男): 큰스님, 제가 질문드리겠습니다. 우리 도량에 오시는 불자님들께서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불법의 공부 과정을 삼 단계로 가르쳐 주셨는데 첫째는 참나의 발견, 즉 자아의 발견과 완성. 둘째는 모두와 하나가 되는 것, 즉 전체 속에 자기가 있음을 셋째는 이런 수행을 거쳐 보살도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만 우둔한 저희들은 아직까지 미혹한 가운데 있습니다. 차제에 이 삼 단계의 공부 과정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여러분들한테 항상 말씀드리곤 했는데도 그게 그렇게 얼른 닿는 분들도 계시고 안 닿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나는 워낙은 그것이…, ‘삼정지각 불이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름해서. 난 그냥 내가 나오는 대로 그냥 하는 것이니 잘 참작해서 들으세요. 육위법도 있고 팔정법도 있고 모두가 있지만, 십이지법도 있고 그렇지만 그것을 전부 떠나서, 그것을 떠나는 게 아니라 한마음에다 넣을 때 작업을 시키기를 이렇게 했죠. 처음에 일차도 죽어야 나를 볼 수가 있고, 이차도 죽어야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고, 셋째도 죽어야 나하고 둘이 아닌 바로 나툼을 알 수 있어서 구경경지를 이룬다고요. 그것도 이름해서 말입니다. 그럴 때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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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세 단계의 그 문제점, 내가 항상 여러분들한테 내가 났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또 상대가 있기 때문에 천체 일체 만법이 바로 나로 인해서 돌아간다구요. 그럴 때 모든 작업을, 나로 인해서 벌어진 거니까 나를 다스리면서, 예를 들어서 ‘바깥의 경계도 내면에 놓고 내면의 경계도 바로 그 안에 놔라.’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부터 하지 말고, 처음에는 무조건 용광로에다 헌 쇠 넣듯 모든 것은 “거기서 나를 이끌고 가고 일체 만법은 거기서 들고 나는 거니까 거기서 하게끔 하고, 감사하게끔 하고 거기 놔라.”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일 단계에 나를 발견해서 보는 단계가 되고, 나를 보는 단계가 된다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바로 거기에서 또 놓고 가되 안에서 어떠한 말이, 뜻이 오더라도, 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할 거는 하고, 거기에서 하라는 대로 맹종하지 말고.
예를 들어서 나를 발견해서 볼 때에 나는 나를 넓혀서 죽고 생사윤회 이런 것에 끄달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말하자면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고 거기서 주장하는 그런 안의 경계가 있습니다. 안의 경계가 있는 데서 거기서 맹종하지 말고 누가 되지 않는 일은 듣고, 누가 되는 일은 듣지 말고, ‘버려라’ 이런 게 아니라 듣지 말고 하여튼 ‘나를 테스트해 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감사하구나.’ 하는 것을 생각해서 거기 또 놔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경계를 맹종하고 또 거기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안으로 기울어지고, 밖에서 끄달리고 또 밖으로 떨어진다면 밖의 경계에 또 끄달리고, 기울어지고. 그러니까 안이나 밖이나 맹종하지 말고 모든 이치를 눈으로 보고 듣고 모든 것을 내가 주장해서 결정을 짓는 데에 그 양면은 다 거기에 총괄이 돼서 그대로 법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야만이 모든 경계나 망상이나 이런 것을 그냥 끄달리지 않고, 그대로 생각하면서도 걸림이 없이 그대로 자기가 주장자를 올바로 세우고 이끌어나가는 공부라고 보겠습니다.
셋째 번에는 둘이 아닌 까닭을 알았기 때문에, 알았기 때문에 둘이 아닌 나툼을 나툰다. 그 나툼이라는 것은 우리가 열반계를 말하죠. 즉 말하자면 열반각지를 말한다, 구경각지를 말한다. 그런데 구경각지는 어떠한 것이 구경각지냐. 여러분들한테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항상, “여러분들 이름이 많으시죠?” 이럽니다. 여러분들 이름이 많으시죠? 남편의 이름도 있고, 사위의 이름도 있고, 아버지의 이름도 있고, 또는 아들의 이름도 있고, 형님의 이름도 있고, 아우의 이름도 있고, 할아버지의 이름도 있고, 여러 가지 이름이 많습니다. 사회에 나가면 또 사회에 나가서 거기 회사원으로서의 또 이름이 있을 거고 거기에서도 많고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것처럼 그 이름(이) 있을 때마다 아들이 덤비면 아버지의 생각과 행과 말과 그게 아주 선연하게, 선명하게 나갈 수 있는 거, 그러한 일들을 하시죠?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뜻도 ‘모든 게 내가 없고 남이 없다’ 이런 문제들이 있는 것은 일체가 내 아님이 없고 일체가 내 도량 아님이 없고, 일체가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고 중생 아님이 없고, 모두가 한자리를 하는 동시에 부처님께서는 예를 들어서 ‘부처도 없는 것이 부처다’ 한 것이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그릇 따라서 종지에 응해 달라면 종지가 돼버리고 사발에 응해 달라면 사발에 응해 버리십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지난번에도 달마대사 얘기했지만, 구렁이가 됐다가 금방 달마대사가 됐던 겁니다. 그런 거와 같이 지금 우리가, 나도 그런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지금 병원에서는 아무 병도 없다는데 나는 죽겠습니다.” 또 “병원에서 몇 달 못 산다고 합니다.” 또는 “어디가 이렇게 아픈데, 몸져 눕지도 않고 이렇게 아픕니다.” 그런데 또 알지도 못하고, 부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그냥 바깥으로 끄달리며 다니는 분들, 이런 분들이 천차만별로 이렇게 그릇대로 주어지듯이 그렇게 많은데, 그럼 우리 인간 사회만, 사생의 그 뜬 것을 볼 때 인간 사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일체 생물에 대해서는 천체가 바로 한데 합쳐지는 게 생물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만약에 구렁이가 ‘나를 구원해주시오’ 하더라도,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부처님은. 부처님의 마음은 구렁이 속으로 들어가서, 예를 들어서 모든 문을 활짝 여시고선 그거를 안아 들인다면 두드러지지도 않으면서 자기 모습이 바로 그게 돼버린단 말입니다, 구렁이가 돼버리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사람이 건져달라고 할 땐 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고, 저 사람이 건져달랄 땐 저 사람이 되고, 또 돼지가 살려달랄 땐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가, 소 속으로 들어갔다, 말 속으로 들어갔다 또 하다못해 풀 속으로도 들어갔다, 나무 속으로도 들어갔다 목신도 되고…,구더기 속으로도 들어가서 구더기도 되고 이러니 이것이 즉 말하자면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부처다 이겁니다. 그게 바로 열반 구경지, 구경지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이름해서 이름입니다.
그러면 삼계를 통달했단 얘깁니다, 삼계를. 나 삼심을 통달해서 삼계를 통달했다. 과거심이나 현재심, 미래심을 다 통달해서 과거 세계, 현재 세계, 미래 세계를 다 통달했다. 그래서 자유자재한다. 그래서 어느 사람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벌레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목신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지신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용신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떠한 것이 일체의 만물만생이 될 때 갖은 각색으로 헤아림이 없이 내가 됐다가 또 이게 됐다가 화해서 돌아가는 이 위치에서 어떤 거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이라고 그렇게 이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경경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각을 이루어서 그 마음이 무심의 그 도리, 중용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이죠. 그래서 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유인이 되려면 우리가 바로 삼 단계의 그, 즉 말하자면 삼정지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내 마음에서…, 십이인연법이니 육바라밀이니 팔정도니 이렇게 많은 일들을 이론적으로 하기 이전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한생각은 체가 없어서 저 바깥에 나가는 것도 문지방 넘어가는 것도, 우리는 저 지금 앞뒤 뚫린 텅 빈 불바퀴 속을 서슴없이 들고 날 때 비로소 우주 삼라대천세계를 그대로 자유스럽게 들고 난다는 그런 뜻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처럼 경을 많이 읽었거나 또는 경의 용어를 쓴다거나 이럴 줄을 몰라서 좀 답답하시겠지만, 난 우주 천하가 그대로 큰 불바퀴, 작은 불바퀴, 둘이 아닌 그 불바퀴가 그대로 현명하게 과학적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처님이 삼천 년 전에 말씀하셨어도 지금 현재도 얘기를 하시고 계시고, 미래에도 얘기하시고 계시고, 과거에도 얘기했다 이겁니다. 그 말씀이 법이 돼서 끊임없이, 끝 간 데 없이 여러분들과 더불어 같이 언제나 함이 없이 하고 계신 그 사실을 여러분들(이) 증명해서 알아야 할 것은 당신, 즉 말하자면 자기로부터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나오셨으니까, 이 세상에 있으니까 상대성 원리로서의 일체 만법을 독불장군이 아닌 서로 공심으로써 공용을 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공용을 할 때 찰나찰나 변하면서, 찰나찰나 화하면서, 찰나찰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면서, 끊어짐이 없이 그렇게 우리 광력과 같고 전력과 같이 자력으로써 우리가 통신력을 충만히 두루하면서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학적으로 친다 하더라도 그렇고, 우리 지금 세 단계의 문제가 바로 이 사람에게는 아주 극치적으로 지금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지나갔으니까, 내가 짊어지고 나왔으니까 없고, 미래에는 가지 않았으니까 없고, 이 짊어진 거는 붙을 자리가 없어서 없다 이겁니다. 그거는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마음도 고정됨이 없고 몸뚱이도 돌아가는 게 고정됨이 없고, 만남도 고정됨이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으니, 어떤 것을 먹을 때 어떤 것을 만났을 때, 어떤 것을 들었을 때 어떤 것을 말할 때, 봤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그렇게 변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어떤 게 부처라고 할 수 없으리만큼 그렇게, 즉 말하자면 화해서, 즉 원자에서 입자로 입자에서 수많은 입자가 화해서 바로 분신이 돼서,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화해서 모습도 마음도, 말도 뜻도 모두가 변해서 화해서 응해주시는 천백억화신의 그 뜻을, 여러분들의 마음속의 그 주인은 바로 이 몸뚱이 속의 중생들의 의식을 다 끌고 다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이 삼 단계의 자유인이 되는 길이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생각할 때, 삼 단계의 그 모든 이치를 놔서…, 우리가 지금 놓으란 말은 두 번째 재차 하는 소리지 여러분들이 지금 놓고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으로 모르니까 붙들고 있는 겁니다, 자꾸자꾸. 착을 두고 욕심내고, 아집이나 아상이나 ‘내가, 내가’ 모두 ‘내가’로 돌아가니까 이거는 어려웁게 부딪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금방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만났다 금방 누구를 만나고…, 둘이 아닌 까닭에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뚜렷하다 이 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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