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125_1992년 5월 17일 정심(定心)의 향기
본문
여기 여러분들은 이렇게 아래에 앉았고 제가 법상 위에 올라앉은 것은, 내가 높고 여러분들이 얕아서 이렇게 앉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모습을 쳐다보는 반면에 여러분들이 다 볼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지 내가 높아서 이 법상에 올라앉은 게 아닙니다. 인간과 더불어 같이, 부처님과 중생들은 모두가 평등한 겁니다. 높고 낮음이 없어서 평등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때에 따라서는 모르시는 분들은, 좀 미처 생각지 못하는 분들은 “법상에 높이 앉았네” 할 수도 있겠죠. 제가 말씀해드리는 것을 다 듣기 위해서 이렇게…, 제가 내려앉아도 될 건데 말입니다. 이렇게 죄송하게 올라앉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마음은 내려앉음과 올라앉음이 둘이 아니며, 평등하며 일체가 다 터졌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우리가 계(戒)‧정(定)‧혜(慧)가 있다고 본다면…, 여러 가지로 분류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계라는 것은 우리 생활 속의 전체입니다. 오계(五戒)니 십계(十戒)니 이백오십계니 이백팔십계니 하는 그 문제들도 전부 계 안에 들어있습니다. 계율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질서를 지키고 또는 시간도 지키고…, 그걸 문란치 않게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모두가 한두 가지가 계율이 아닙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 살아나가면서 지켜야 하는 문제들이 너무나 너무나 많아서, 누(累)가 될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누가 되지 않을 일은 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남이 전부 동시에 이익한 문제가 있다면 거짓말을 하는 게 거짓말이 아니 될 수가 있으니 그것도 또한 계율에 속합니다. 빼고 낄 줄을 모른다면 그거는 목석과도 같은 거니까. 그래서 계는 정에 들어있다, 정심(定心)에 들어있다 이겁니다. 계는 정심에 들어있고 혜도 정심에 들어있어서 바로 계, 혜, 정입니다.
우리가 그 정심으로 인해서, 한자리로 인해서 일체 만법이 들고 나는 이 도리를 여러분들은 잘 아셔야, 그 정심에서 밝아져야만이 해탈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해탈이라는 것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이름마저도 벗어나야 해탈지견향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달은 바로 우리가 이 마음의 암흑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달과 같다고 했습니다. 달과 같이 밝음, 어둠을 비춰주는 달과 같이 밝음이라고 했습니다. 해가 거기에 속해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일체 만중생을 따뜻하게 키워주고 비춰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마음에 어떻게 속해 있느냐? 우리 생활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씨로, 따뜻한 지혜로써 말도 부드럽게 하고 행동도 부드럽게 하고, 생각 생각이 부드러운 지혜로써 서로 융합해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해와 같은 겁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하면 남의 마음도 따뜻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한데 어찌 남의 마음이 따뜻할 때를 바라겠습니까? 내 마음이 악하게 되면 그건 무간지옥이라 그랬습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선하고 착하고 밝고 깨끗하게 정심으로써 지혜롭게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일체 사람들을 대하고 일체 중생을 대하고, 가정을 대하고 상대를 모든 거를 대할 때 따뜻한 마음으로 둘이 아닌 도리를 대한다면, 마음은 체가 없는 거라 스스로 상대도 밝아져서 나와 더불어 밝게 불을 켤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이러니 저러니, “나는 주인공을 찾는데도 이렇게 안 됩니다. 그런데 주인공을 찾았더니 잘 되다가 또 안 됩니다.” 이러거든요. 여러분들이 한 발짝 떼어놓고, 한 발짝 떼어놓는 것만 알았지 한 발짝 또 놓고 드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한 발짝을 들었으면 한 발짝은 놓고, 한 발짝 들었으면 한 발짝 놓고, 이게 정상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안 되는 것도 알아야, 드는 것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니라 놓는 것도 알아야, 들고 놓고 들고 놓고 하는 작용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그런 창조력을 기를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을 찾으니까 되더니, 어느 만치 되더니 안 되더라 이겁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도 알아야지, 때에 따라서는 구덩이에 빠질 텐데 전진하기만 하면 빠져 죽죠? 그때는 물러서야 빠져 죽지 않죠? 그러니 드는 것도 법, 들지 않는 것도 법. 그래서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니라 한 것입니다. 왜 안 되는 것도 법이라고 했느냐? 구덩이에 빠지겠으니까 빠질 일은 물러서야 한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 물러서서 다시 굴려서 놓으면 빠지지 않을 데로 갈 수가 있으니까, 예를 들어서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라 했습니다. 이거를 잘 지혜롭게, 잘 굴릴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생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문제 등등이 우리가 모든 가정에서 아픔을 천차만별로, 몸만 아파서 아픈 게 아니라 천차만별로 아픔을 가지고 오는데 가져오는 그 재료를, 바로 자기가 지금 벗어날 수 있는 공부하는 길을 들어섰는데 그냥 맨손으로 들어설 수가 없으니까 그 재료를 가지고 들어선 겁니다. 그 재료가 아니면 이 길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살지.’ 하는 마음에서 이 길을 들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 말 한마디를 하고 넘어가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재료가, 이 인간의 이 모든 것은 공(空)했다고 했습니다.
공한 자체가, 수없이 얘길 하지만, 프로펠러 돌아가는 데에, 그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거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습니까? 먼지 앉을 새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병이 났다 하고, 모두 여러 가지 아픔이 생겼다 합니다. 내가 이런 걸 당했다, 내가 가졌다, 내가 병났다, 모두가 ‘내가’입니다, 내가! 내가 공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간다고 했죠. 여러분들이 그걸 짐작하시죠? 고정됨이 없이 보고 듣고, 행하고 말하고, 만나고 먹고, 고정됨이 없이 말입니다. 그랬으니까 우리가 한시 반시도 그냥 고정 되게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변하고 부서지고 모든 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겠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 재료를 가져오는 거 보면 모두 ‘내가’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가 아니라 전체 포함해서 돌아가는 길에, 그런 것이 마음에 따라서 부딪치는 것이니까, 그 업식으로 (인)해서, 인연에 따라서 업식이 돼서 나한테 자꾸 연관성이 되는 거니까, 내 몸속에 들어서 자꾸, 용도에 따라서 자꾸 나오는 그거를 업식이라고 하고 업보라고 하고 유전이라고 하고 영계성이라고 하고 이런 거를 다 ‘아니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모습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는 길을,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나한테 이 공부할 수 있는 재료가 생긴 거다. 업보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병고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재료를 나한테 이렇게 고맙게도, 감사하게도 이렇게 이끌어주는 재료가 주어진 거다.’ 이 재료를 가지고 나는 관찰하고 거기다가 놓고, 내 마음의 주인한테다 맡겨놓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지켜보고 체험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냥 틀고 앉아서 ‘이게 뭣고?’라든가, 이것을 의정을 강제로 내가지고 한다든가 이런다면 그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하나하나 지켜보고 체험하고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일체 만법의 근원이며 그 근본을 해탈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그냥 “나는 주인공을 찾았는데도 이렇습니다.” 하지 말고, 찾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겁니다. 본래 있는 거니까! 본래 없는 것을 찾는 거라야 이게 문제가 되지만 여러분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거를 발견하는 겁니다. 즉 암흑 속에서 밝음이 불끈 솟아서 불이 일어나면 모두가 밝게 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말로 이러고 저러고 이러고 저러고, ‘이 병원을 가봐야 옳을까, 저길 가봐야 옳을까, 저길 가봐야 옳을까?’ 이러지 마시고, 내 중심에서 ‘이거는 병원을 좀 갔다 와야 되겠다.’ 한다면 그대로 가는 것도 법이고, ‘병원을 안 가도 이 한마음 속의 모든 생명들이 한마음으로 작용을 해주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이 들면 그대로 거기다 놓고 실험을 하고 지켜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도리인 것을….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지 내 속에 들어있는 의식의 그 마음들이, 여러분들이 따지고 보면 하나가 아니죠. 이 속에 들어있는 수십억의 그 모습들이 다 여러분의 모습들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그 여러 가지의 모습들이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해주는 바람에 여러분들이 걸어 다니고 말도 하고 ‘나’라고 그러기도 하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과 마음에, 나를 보러 오더라도 나에게 말을 해서 그렇게 하려고만 하지 말고,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저 마음도 내가 이렇게 마음에다, 모두 한마음에다, ‘더불어 같이 한마음인데 어찌 스님의 마음인들 이 속에 아니 계시랴!’ 일체 만법,이 또는 그 만인의 마음이, 또는 일체제불의 마음이 다 내가 아파서 응해달라고 하신다면 응신이 돼서, 약사가 돼가지고 여러분들의 병을, 여러 몸에 들어있는 의식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 돼서 고쳐주시고, 어떠한 애로가 있든지 명이 짧다면 칠성이 돼주시고, 응신으로, 찰나에 드셨다가 나시고 드셨다 나시고…. 그리고 좋은 데로 못 간다 한다면, 그래서 좋은 데로 가게 해달라고 이렇게 정성을 지극하게 한다면 바로 지장이 돼서 여러분들의 그 의식과 더불어 같이 한데 합쳐서 그 지옥문을 뚫고 다 허물어뜨리고 나가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료한 여러분들의 마음의 슬기로운 그 묘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그렇게 끄달리고 그런다면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하며 어떻게 모든 것에서, 그 암흑 속에서 벗어나서 이 태양을 다 보고 행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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