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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법문-130_2000년 9월 3일 모습 없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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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스님. 사업 관계로 5, 6년 전 큰스님을 친견하면 그때마다 큰스님께서는 사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계속 부도와 실패만 거듭하였습니다. 처음엔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저희 진주 지원장이신 혜근 스님께서는 시려울 정도로 간절하게 마음을 내어 주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에 항상 저의 부족함을 느꼈고 때로는 돌아서서 여러 차례 눈물도 흘렸습니다이런 시간이 지난 후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든 기울지 않는 마음 자리에서 간절하게 수행해 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업이나 습 이전에 저의 게으름 때문에 때로는 힘들 때도 많이 있지만 저로서는 이 방법 이외에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기에 어느 자리, 어떤 장소를 가더라도 항상 근본에서 지혜롭게 이끌어.’ 관하면서 그냥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기회가 되어 이렇게 큰스님께 인사도 올리고 간단하나마 질문도 드리게 됨을 다시 한번 근본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스님, 간단하게 질문 올리겠습니다.

 

새벽부터 이렇게 와서 큰스님의 법문을 직접 청하여 듣는 것과 지방 같은 경우 그냥 비디오 법문이나 카세트를 통하여 듣는 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요? 다시 한번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내가 대답하기 이전에 한번 얘기할 테니 잘 음미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권투하는 사람들이 권투를 서로 하는데 상황에 따라서, 이쪽은 이쪽대로 상황에 따라서 때리지 정해 놓고 때리는 데가 없습니다. 그죠? 이쪽도 정해 놓고 맞는 데가 없습니다. 그죠? 정해 놓고 때리고 정해 놓고 맞는 데가 없으니 그 가운데 뭐라고, ‘누가 맞았고 누가 때렸고, 어딜 때렸고 어딜 맞았고이거를 말을 하겠습니까, 못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거는 우리가 비디오로 보든 그냥 이렇게 실무자로 듣든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우리들의 환상이 진짜, 진짜입니까? 그것은 환상 놀음입니다. 컴퓨터에서 해서 눌러서 놀이를 하는 것도 환상입니다, 그게. 근데 환상인데 왜 환상이 아니게 보일 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느냐. 그거는 댁의 몸이나 내 몸이나, 몸은 공체입니다. 환상이란 말입니다. 환상인데 지금 내가 말을 하는 것과 어저께 내가 말해 놓은 거 그것을 음미해서 생각할 때 이것이 어느 놈이 때린 거냐? 어느 놈이 어딜 때렸느냐? 어딜 맞았느냐?’ 이거를 생각해 볼 때 때린다고 하고 때리지도 않았고, 맞는다고 하고 맞지도 않았고, 어딜 때린 것도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됐죠? 그러니까 때린 사이도 없고 맞은 사이도 없는 거죠

 

그 통굴에 비디오를 본다고 해도, 비디오를 보실 때에 여러분이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불이 들어오고 생각을 안 하면 생각 안 하는 대로 불이 안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건 자유입니다. 자유입니다, 그거.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안 하면 모르지만 그 실체에도, 거기도 내가 있고 지금 여기도 내가 있고, 내가 있는데 내가 있는 자체가 환상입니다. 이것도 환상, 그것도 환상. 그런데 댁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게 실천이, 실지가 되는 거죠.

우리가 지난번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셋째 일요일 날은 여직껏 법회 해 놓은 것이 있으니 그걸 한번 되 뒤집어서 한번 보여 드리는 것이 공부하는 데 실질적으로 좋겠다. 그리고 첫째 일요일 날만 내가 하겠다.” 이렇게 했습니다. 댁의 생각들은 어떠십니까? ‘과거도 현실로 봐라.’ 이랬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이거 참, 질문하는 데 말이 많아서 죄송합니다마는,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이 컴퓨터에서 놀이 하는 거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이해가 안 가십니까?

 

이거는 꼭 말을 해야만 되겠어서 지금 얘기를 하는 겁니다. 왜 관하라고 했느냐. 관하질 않으면 당신네가 살기도 어렵고 괴롭고, 하는 일도 그렇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많다. 그러니까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살아야만 되겠으니까 그렇게 해라이랬습니까? 왜 관하랬느냐 하면 자기가 태어날 때 자기 모습은 부모의 인연으로 인해서 은혜를 받지만 생명의 능력은, 생명력은 자기가 가지고 들어가는 거란 말입니다. 자기 원소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 생기면 바로 모습 아닌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지 되겠죠. 그게 불성입니다. 그것이 천차만별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바로 절대적인 에너지처입니다. 그래, 주처라고 그러죠.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주처를 자기가 각각 그렇게 영리하게 쓸 수 있다는 그 점이, 우리가 모두 이 몸도 공체고, 공체이기 때문에 속에 제각기 모두 분리돼서 작용을 하게끔 돼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몸뚱이 속도 한 지구와 같기도 하고 우주와 같기도 하다 이런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누구가 하고, 누구가 고통을 받고 누구가 그 문제가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당하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됐기 때문에 자기는, 모습 있는 자기는 모습 없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된단 얘깁니다. 진짜로 믿어야 태평해지죠. 진짜로 믿어야 갖다 맡겨도, ‘너만이 할 수 있어!’ 이렇게 맡겨도 그게 진짜로 실천이 옮겨지고, 그게 법이 땅에 한데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공법으로서의 공용(共用)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질문하신 바는 테레비를 보나 누구에게 들으나, 지금 여기서 들으나 사람이 생각하고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문제는 커지고 문제는 달라지는 겁니다. 육조 스님은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서 거기에서 깨우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읽는 소릴 듣고. 그러니까 남이 읽는 소리나 하는 소리나, 내가 지금 하는 소리나 뭐이 다릅니까? 새록새록 다른 말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데는 조금도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 그대로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하고 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못 하죠, 못 쓰죠. 말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말을 못하죠. 또 사용하는 것도 마음대로 사용치 못하죠. 사용 마음대로 하는 것 있어요? 마음대로 하려면 그냥 그대로 자기의 실체를 그냥 알아야 되겠죠. 그거 어렵다고 생각지 마세요. 그냥 자기한테 원소가 들어 있으니까요. 자기가 있으니까 들어 있고요. 그 원소가 없으면 자기는 송장이 되는 거고요, 그러니까요.

 

누구를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대신 살아줄 수 없어요, 모두가 다.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요. 먹고 자고 행하는 것을 도무지 (대신) 못 하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나와서 여러분들이 걷고 여러분들이 행하시라 이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이해가 안 가시걸랑은 서로 토론을 자주 가지면 알게 되는 겁니다. ‘너만이 알게 해 줄 수 있어!’ 하고 자기 불성, 주인공 자꾸 찾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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