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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법문-146_1996년 6월 16일 주인공 줄을 잡고서 모든 것을 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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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 “탈렌트가 영화를 하다가 영화가 막이 내리면 그뿐이듯이 인생도 그러하다. 그러니까 다만 오직 자기 중심 심봉처를 의지해라. 의지하고 돌아가라. 의지하고 돌아가라.” 하도 바람에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인생살이가 돌아가니까 가운데 중심, 즉 말하자면 그걸 쥐고선 바퀴가 돌아가듯이, 인생은 심봉을 쥐고서 심봉은 끄떡도 안 하고 힘을 배출하기 때문에 그 힘을 바로 잡고서 돌아가는 거죠, 인생이. 그래서 거기에선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잘하고 못하고, 못나고 잘나고, 여자고 남자고, 낮고 높고, 잘 살고 못 살고 이걸 떠나서, 오직 내 심봉을 딱 쥐고서 그대로 흘러가듯이 돌아갑니다. 이 심봉을 의지한다면 바퀴가 이탈되지 않으니까요. 이 심봉이라는 건 반야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기 주처라고도 할 수 있고, 자아라고도 할 수 있고,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부처라고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이름이 다양합니다. 다만 그 의지처만 의지하면서, 오직 내가 함이 없이 하면서 돌아간다면 여러분들이 한 찰나에 그냥, 그대로 그대로 자연스럽게 여여하게 사는 겁니다. 여여한 삷의 보람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금도 아리송하시죠? 이렇게 말씀을 해 드려도 아리송하시죠? 한 가질 보면 열 가질 본다고 우리가 현재의 살림살이를 그렇게 하시면서도 왜 아리송합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그냥 화해서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거를 느끼고 알고 하면서, 왜 그게 아리송합니까 이겁니다. 그 생각 하나만 ‘아! 이렇구나. 이러니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하고 탁 놓는다면 그냥, 그냥 그대롭니다. 그대로. 찰납니다, 그냥!

 

부처님이 나를 깨우치게 해서 올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여러분들한테 행복을 갖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뺏어가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업이 많아서 누가 뺏어가는 것도 없습니다. 뺏어갈 사이가 있어야죠? 그리고 갖다 줄 사이도 없단 말입니다. 자기가 그대로 그냥, 그냥 하는 대로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보는 대로 날아가고, 하는 대로 날아가고, 듣는 대로 날아가고 도무지 내가 했다, 내가 안했다 할 수가 없게끔 되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여러분들께서 어려움이 크게 내한테 벌어졌다, 병고가 생겼다, 어두움이 벌어졌다 하는 것은 단 하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살아오던 관습과 집착과 욕심에 의해서…. 그래서 ‘과거는 묻지 마라, 미래도 생각지 마라, 오늘도 공했다, 공했으니까 찰나찰나 가버리는 것을 착을 두지 말라’ 그랬는데 그거를 착을 가지고선 온통 ‘작년에는 어땠느니, 올해는 어땠느니’ 물론 얘기야 하시겠지만, 함이 없이 얘기하고, 속에다가 착을 두고 욕심 두고 그렇게 하지 말고, 그대로 평범하게 ‘아, 작년에는 이렇게 이렇게 했으니까, 올해는 이렇게 이렇게 해 나가야지 되지 않겠어?’ 하고 말을 여여하게 그대로 해라 이거야. 꼭 하나가 문제가 되는 게 그 생각입니다. 업도 붙을 자리가 없고, 고도 붙을 자리가 없고, 병도 붙을 자리가 없고, 아무 것도 붙을 자리가 없는데 그 생각으로 붙잡고는 그냥 이 심봉을 붙들고 의지하라고 그랬더니 심봉은, 심봉이 주인공이라는 이름만 부르고 붙드는 거는 그 고(苦)를 붙드는 거예요. “심봉을 의지하고선 바퀴는 돌아가라. 여여하게 돌아가라.” 그랬더니 심봉은 이름만 부르고 고를 붙들고 그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걸 놓고 불러야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지하는, 부르는 것도 그것도 말일 뿐이다. 생각으로 그 의지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일거수 일투족 거기다 의지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감사함도 거기 있고, 즐거움도 거기 있고 같이 붙들고 울 수도 있고, 뭐 매사 거를 다 할 수 있는 것이 그 보배입니다. 보배! 


그런데 거기에다가만 그렇게 심중을 굳히고 ‘의지할 수 있는 데는 여기밖에 없다’ 하고 의지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 의지하는 마음보다도 욕심 찬 마음, 그 탐심, 치심, 그 모든 것이…, 하여튼 간섭하는 거는 뭐 이루 말할 수도 없고, 남의 간섭이라는 거는 저기 똥 굴러가는 거를 봐도, 저 똥이 어디로 굴러가느냐고 야단이에요. 참내! 아이, 어디로 굴러가든지…. 우리 저 3층에 새들도 와 와가지고 뭐 먹을 거를 뿌려주면요, 사람이 안 다니는 데부터 먹어요. 그리고 사람이 다니는 데는 좀 ㈜춤하고 가서 몰아서 가서 있다가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면 와 와서 다 먹어요. 그렇게 영묘한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의지하라는 데는 안하고, 그냥 남의 참견 다 하고, 남의 탓은 다 하고, 자기가 탓할 사이가 어딨습니까? 


지금, 빌딩에 불이 나서 자기 살 구멍을 찾아나가는데 그 순간에 아, 남의 탓할 사이가 어딨습니까, 글쎄? 남의 탓하지, 남의 참견하지, 그러고는 그 심봉에 의지했으면 거기에다가 다 넣고 ‘그저 가설이 아들과 부모 모든 게 다 가설이 돼 있으니 거기다 놓고 그저 의지해라.’ 이렇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입으로 망해! 입으로 다 깨트려! 여기다간 “주인공!” 하고 이름만 부르고, 어떤 땐 이름도 안 부르고 그냥 요놈의 새끼야, 배울 시기에 배워야지 이럴 수가 있느냐고 펄펄펄펄 뛰고 온통 난리가 나니, 외려 그럭하면 따뜻하질 못해서 달아나가요. 자기가 하는 게 어깨에 무거우면은, 또 야단을 치면 그게 뭐이 무거우냐고 야단을 치면 달아나가요, 그냥 다 내려놓고. 그러니까 아, 마음 하나만 그렇게 의지하고 모든 것을 놓고 간다면, ‘모든 것을 놓고 간다면’이 아니라 모든 것을 놓고 가니까 그냥 거기에 착을 두지 마라 이겁니다. 한 생각이 뛰어나야 내 가정도 뛰어난 살림살이가 되고….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나는 지금 오늘 이렇게 말한 것이 제일 귀중한 겁니다. 우리가 찰나찰나 이렇게 프로펠러 돌아가듯이 인생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그 자리에 뭐가 붙을 자리가 있느냐. 병도 붙을 자리가 없다 하고 하는데도 그 마음 하나 챙겨서 진짜로 믿고…, 아니, 내가 없는 말을 한 건 아니거든요? 현실에 그냥 진리를 상황대로 얘기했을 뿐이에요. 얘기했는데 그 진리대로 살지 않고 왜곡되게 사니까 진리대로 사시라 이런 얘기죠. 그러면 얼굴도 허옇게 피고 사는 날까진 틀림없이 살 겁니다, 아마! 그리고 영원할 것입니다. 왜냐? 자꾸 자기 자신의…, 자발적으로 자기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어떠한 차원으로서 모습을 가지고 나오든 자기 자유니깐요. 


여러분들 가정에 복잡한 것을 때로는 “이렇게 이렇게 하시라”고 해서 그 한가지는 면했으나, 또 앞으로 닥쳐올 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 다 이거를, 아는 게 없는 아는 거를 알아 놓고, 내가 진실하게 실천할 수 있어야만이 어떠한 게 와도 대치할 수가 있고, 어떠한 게 와도 둘 아닌 도리를 알게 되면 아마 귀신이 이 세상에서 다 몰려온대도 “허허!” 허고 웃을 겁니다. 왜냐? 둘이 아닌 까닭에 말입니다. 자기 손가락 하나가 자기 손가락 하나를 해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한 생각을, 그렇게 공했다는 걸 알고 그냥 휙휙 마음을 편안하게 두고 그냥 넘어간다면 그냥 거기에 의지, 이 기둥만 하나, 기둥이라면 기둥만 하나 딱 붙들고 있으면은 바람이 모진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날아가진 않아요. 


그와 같이 그냥 거기에 모든 것을 다 거기다가, 폐일언하고 거기다가 모든 거를 다 접근시켜 놓으면 마음에서 고장난 거 마음으로 고쳐야 하고, 의식에서 고장난 건 마음을 통해서 고쳐야 하고, 모든 게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지, 천차만별이 다 마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형성된 것도 이 차원의 모습을 가지고 내가 지금 사는 그것이 나의 소임입니다. 그건 누구한테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소임을 가지고 영화 탈렌트처럼 내가 소임을 받아 가지고 나온 겁니다. 그거를 누가 만들어서 가지고 나왔느냐? 자기네들이 다 만들어서 가지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아, 이런 것도 붙들 게 없고 이런 것도 붙들 게 없고, 업도 붙을 게 없고 고도 붙을 게 없고 병도 붙을 게 없다!’ 하는 건전한 생각으로 주인공의 그 줄만 잡고서 모든 거를 거기다가, 감사하게 생각하고 거기다가 바꾸어서 내가 대치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기른다면 그것으로써 인생살이는 족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진짜로 여러분들은 다 모르십니다마는 모른다고 해서 내가 지금 “제가 여러분들한테 이렇게 말하면 진짜로 믿고 실천을 하라.” 하는 거는 내가 모르든 알든 상관이 없이 진짜로 믿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냥 그대롭니다. 그냥 그대로예요. 그냥 그대로 한 소식 넘어간 겁니다. 그런데 ‘아이고, 내가 배우지도 못하고 이렇게 저거하면서 내가 어떻게 그분같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생각이 탈인 거예요. 그러니 스무드하게 넘어갈 일도, 집안에도 넘어갈 일도 생각으로 붙들어서 오히려 그것을 망가뜨리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벌겨놓는 겁니다. 그 벌겨지면 왜 이렇게, 이게 이렇게 벌겨졌으니 어떡하느냐고 또 뛰어옵니다. 내가 볼 때 어떻겠습니까? ‘세상에도! 아, 그냥 갈 일을 왜 이렇게 만들어서 이렇게 분란을 일으켜 가지고는 또 왔나.’ 이렇게 되면 어떻게 생각이 드느냐 하면 기가 막혀서 말입니다, “허허, 참 기가 막혀서….” 이럽니다. 혼잣말이죠. “참, 기가 막혀서….” 이럽니다. 그거를 어따가 말을 합니까? 그러면 “그저 열심히 관하고 그러면 내, 관하는 대로 그 진정코 관하면은 나도 거기 도와주게 돼 있어.” 그러니 진정코 진실하게 관하라고 이렇게 보내 놓으면 얼마 안 있으면 “아이고 스님, 해결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이래요, 글쎄. 그래 그때는 때로는 화가 나서 뭐라 그러냐 하면 “당신의 전깃줄이 있으니까 내 전깃줄이 있고, 내 전깃줄이 있으니까 당신의 전깃줄이 있는 거지, 맞붙었기 때문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지 뭐가 고마워?” 이러죠. “고맙게 생각하려면 당신 주인공한테 고맙게 생각해!” 이러고. 이거 정말, 나는 그렇게 힘 드는 줄 몰랐습니다마는…, 그렇게 힘 드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예전에도 내 몸뚱이가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내 이것만은, 한 가지만은 결정적으로 나는 끝 간 데 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겁니다. 이 세상을 다 주고 유혹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여러분들이…, 그래서 내가 어떤 때는 그럽니다. “돈을 하늘 땅만치 가져온대도 당신 마음이 그렇지 못하다면 소용없어, 공덕이 안돼. 당신네들이 돈 가져오는 거 벌어서 먹고 살 양으로 내가 중노릇하는 줄 알아?” 이럽니다. 그러면 죽어야죠. 아니, 죽기 이전에 벌써 저 땅속에 사는 하천세계로 떨어질 겁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면 하천세계로 떨어진들 하나도 겁나는 거 없습니다. 난 생각이 다 있으니까요. 


질문하실 분 있다면서요? 그런데 말입니다. 질문하기 전에 지금 내가 한 발짝 고정된 게 없이 화해서 돌아가니까 병 붙을 것도 없고 업 붙을 것도 없고 고(苦) 붙을 것도 없다 이랬으니까 그 가운데서 내 마음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가정이 부흥해질 수도 있고, 가정이 아주 한데 떨어진 것도 일으켜 세울 수도 없는 형태가 되는 겁니다. “아주 재산을 다 잊어버리게 됐고 집도 날아가게 생겼는데 이거를 어떡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럴 때 내 극치적으로 이럽니다. 나도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방편으로 말을 안 해주고는 안 되죠. 왜냐하면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요. “아주 진실하게 관하면 귀인이 생기게 돼.” 그러니까 그렇게 하라고 그럽니다. 그럭하고 그 귀인은 부처님께서 해주게끔 합니다.  


이렇게 해나가는 이 심정을 여러분들은 잘 아셔야 될 겁니다. 여러분들이 눈물을 석 동이를 흘렸다면 나는 아마 다섯, 여섯 동이를 흘릴 겁니다. 뼈아프게 말입니다. 여북하면 구더기, 진드기가 된다 하더라도 겁 안 난다 하는 겁니까. 그렇게 겁 안 나는 사람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럽니다. 진드기로 그냥 그렇게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진드기가 된다 하더라도 겁 안 난다 이겁니다. 그 뜻을 잘 아셔서 겁내지 마세요. 모든 일에 겁내지 마세요. 죽는다 해도 겁내지 말고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겁내지 말고, 내 살림이 그냥 이 시점에서 그냥 두럭이 난다 하더라도 겁내지 마세요. 겁내지 않는다면 주변에서 다 이렇게 보는 데가 있어요. 보는 데가 있어서 ‘너는 이럭하고 이럭하고 이럭하고, 이렇게 해라.’ 하고 그래서 이름을 붙여서 독성의 이름도 있고 신장의 이름도 있고 다 있잖습니까? 관세음보살의 이름도 있고 여러 가지 이름이 많듯이 말입니다. 왜, 배추, 무, 테레비에 뭐? 배추 무슨 이름을 잊어버렸어. 배추 도사? 무 도사? 그렇게 하고 이렇게 몸을 바꾸어서 이렇게 돌봐주죠? 테레비에서 보셨죠? 

그런 것과 같은 것이 보살행이에요. 그러니 겁낼 게 뭐 있어요? 내가 보살을 항상 모시고 있는데, 자기 속에 부처 보살 법신, 뭐 다 모시고 있는데…. 하여튼 만 분을 모신다 하더라도 두드러지지 않으니까요. 만 분을 다 쓴다 하더라도 줄지 않으니까요. 그 법이 아주 영묘한 법이죠. 이렇게 말씀드려도 납득이 안 가신다면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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