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39_1995년 7월 2일 왜 놓아지지 않을까요
본문
우리는 모두 당신 뿌리에 놓으라고 하니까, 모두 어떻게 놓느냐고 합니다. 어떻게 놓습니까? ‘놓으려고, 놓으려고 애를 써도 놓아지지 않습니다.’ 하거든요. 왜 그럴까요? 본래 콩씨와 콩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인데. 그래서 콩씨가 콩싹으로 화하려면 수분도 필요하고 흙도 필요합니다. 가운데는 그 부분들은 다 놔두고라도 정자, 난자를 비롯해서 자기가 싹으로 화합니다. 싹으로 화하는데 그 싹이 어디 가서 내 콩씨를 찾겠습니까? 네? 뿌리로, 과거로 돌아가서 뿌리로 찾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미래로 찾으러 가겠습니까? 그러면 형상에게 내 뿌리 씨를 달라고 하겠습니까? 이름에게 달라고 하겠습니까? 중들의 고기 덩어리한테 달라고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달라고 하며 누구를 믿으며…. 그런데 그 콩씨만은 바로 자기 콩씨를, 콩싹을 만들어서 자기가 자기 몸뚱이를 버려서 바로 싹으로 만들어서, 그 싹이 화하게 되면 또 콩씨를 열리게 한답니다. 그러고 하나도 아닌 몇 개씩, 그러고 다 딴 사람들 먹이고도 그 종자는 되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이익중생이라고 그러죠. 살아나가면서 모두 남과 나와 둘 아니게 이익을 준다는 뜻이죠. 여러분들 몸뚱이 속에도 헤아릴 수가 없이 중생들이 이익중생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더불어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먹어도 같이 먹고, 들어도 같이 듣고, 봐도 같이 보고, 사랑을 해도 같이 하고, 같이 존재를 하는데. 세상에 생각하자면 눈물이 나는 지경이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니까요. 그러는 자기 중심의 막대기를 믿지 않고 어딜 믿습니까? 뭘 믿습니까? 믿을 게 뭐이 있습니까?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이나 젊은이나 허망하게 그냥 저 구덩이에 산 채로 묻히게 되는 것도 콩씨가 콩싹을 다스리고 나간다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도님들 얘기 들으니까, 거기 가기 싫어서 시장을 봐오는데 딴 데로 갔다고 합디다. 왜 가기 싫었을까요? 그건 콩씨와 콩싹이 서로 통하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몸뚱이가 자기라고 하지 마세요. 반드시 자기 뿌리만이 자기 몸을 이끌어가는 그런 선장 노릇을 하는 겁니다. 자기 몸뚱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끌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거기에 줬기 때문에, 거기서 자기한테 콱 맡겼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 몸뚱이를 이끌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죠. 그렇기 때문에 이리로 가면 죽게 됐을 때, 자동적으로 이리로 가게 만들죠. 그건 왜? 자기 마음속에 주인이 있기 때문에 자기 몸뚱이를 끌고 가는 거죠. 바로 즉, 자기 몸뚱이자 시자며 시자이자 바로 자기입니다. 누구가 ‘나는 그런 데서 그렇게 잘못되는 길을 걷지 않겠다.’ 해서 걷지 않아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르시는 게 있어요. 놓아지지 않는다 이런 거, 왜 놓아지질 않느냐? 여러분이 지금 항상 내가 여러분한테 말하듯이 혼자 보는 것도 없고, 혼자 먹는 것도 없고, 더불어 같이 먹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같이 움죽거리고, 자도 같이 자고 아, 여러분들 안 그러십니까? 여러분이 일어나게 되고 앉게 되고, 말을 하게 되고,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이러는 게 누구 덕으로 그렇게 됩니까? 모두 여러분들의 몸뚱이 속의 자생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바로 뭉쳤기 때문에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같이 뭉쳤기 때문에. 여러분 열 개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이 손가락이 하나 둘 없으면 무거운 거를 꼭 들어야 할 열 손가락이 다 들어가야 할 거를 못 들게 됩니다. 그러듯이 여러분들의 그 한 몸뚱이 속에 세계가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가 벌어졌어요.
그래서 한 나라, 위 나라가 있고 장 나라가 있고 심장 나라가 있고, 이 모든 척추 나라가 있고, 척수 나라가 있고, 식도 나라가 있고, 이 나라가 많이 있어서 그 나라를 한데 포함된 세계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세계 중에 한 나라만 없어져도 이 전체 세계가 다 죽는 겁니다. 한 덩어리가 다 죽어요. 그러니 어찌 내가 내 껍데기 ‘나’가 나라고 하면서 뽐내겠습니까? 뽐낼 거 하나도 없죠. 내가 당당히 홀로 섰다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죠. 허나 홀로가 아니라 한마음으로 구성된 동체(同體)란 말입니다. 그래서 동체 속에 움죽거리지 않으면서 힘을 배려해 주는 선장 있고, 그 나머지는 움죽거리는 데 용도에 따라서 전력을 끌어다 쓰듯이 용도에 따라서 쓰기만 하면 되는 거를 그렇게 못한다고 합니다.
수많은 팔만대장경을 수차로 읽어가면서 해도, 고걸 줄여서 줄여서 놓은 게 지금 반야심경입니다. 그 반야심경을 더 줄인다면 불심입니다, 불심! 아주 간단하게. 마음이에요, 마음! 천차만별의 그 벌어지는 일들이 마음 하나로 벌어지는 겁니다, 그게. 그러니 마음 하나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시원하게 여러분들도 한판 치고 울든, 한판 치고 웃든, 그냥 여러분들도 좀 그래봤으면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우리가 내 몸 속에 들어있는 생명체들이 의식으로 말미암아 내 입을 통하고, 그래서 다 나오는 말을 잘못하는 거는, 좀 더 이렇게 다스리면서 잘하는 것은 감사하게 다스리면서, 그래서 항상 그러죠. 주인공에 감사함을 거기다가 하고 또 잘못되는 거는 ‘너만이, 너 속에서 나온 거니까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거기다가 놔라, 놔라 이러는 거죠. 그렇게 되면 일거 양득이 아니라 일거 삼득이 되죠. 첫째, 조상 위로 부모가, 역대의 부모가 나 하나로 인해서 건져지죠. 또 자기가 2세들을 낳아놓은, 그 낳아놓은 그네들이 또 잘못되는 일이 없이 건져지죠. 고 다음에는 3세가 그러니까 조상, 나, 자식 3대가 다 세세생생에 영원히 살 수 있는 바탕이 생기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이 좀 더 생각을 깊이 해보십시오. ‘공(空)이 색(色)이고, 색이 공이니라. 공과 색은 둘이 아니니라. 콩씨와 콩싹이 둘이 아니니라.’ 이런 거와 똑같은 얘기죠.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니라. 그래서 콩싹이 콩씨를 정말 발견한다면, 콩싹과 콩씨는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그 몸이 그렇게 크니라. 그래서 “몸을 보고 크다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하면, “몸을 보고는 크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들을 했죠. 하여튼 우리 살기 위해서, 또는 영원하기 위해서, 그 영원한 거를 알기 위해서, 인생이 어떻게 가야 삶의 보람이 있고, 어떻게 살아야만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만이 내 몸통 속에서 벗어나고, 내 몸통 속에서 벗어나면 이 지구통 속에서 벗어나고, 지구통 속에서 벗어나면 이 모든 공기통 속에서 또 벗어나고 또 거기에서 벗어나면 자유인이 되게끔,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더운데도 공부를 하는 것을 조금도 '내가 거기 에이! 귀찮게 거기, 더운데 갔다 왔어, 놀기나 할 걸.' 그러지 마시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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