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64_1998년 2월 15일 조상과 후손이 함께하는 공양의 의미
본문
질문: 지난 주 일요일입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방송 법회를 들었습니다, 제가. 근데 이천에 계시는 스님이신데 제사에 관한 것을 쭉 법문을 하시더라고요. 육법공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자세하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랬는데 잘 말씀 다 하시고 마지막에 “안양에 있는 한마음선원에서 하는 것은 떡만 하나 놓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잘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더구나 제가 열심히 나가는 선원에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제가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저희야말로 초, 향, 공양미, 또 꽃, 그리고 다기, 여섯 가지 우리 다 놓지 않습니까? 그렇게 공양하고 그 다음에는 제주들 가실 때에 또 공양 극진히 잘 차려서 드리거든요. 제가 그거를 참석해서 자주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무 이상해가지고 여기에 대해서 스님께서 자세히 말씀을 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큰스님: 그렇게 되면 그거부터 얘기해야겠군요. 내가 항상 말하기를 “위패를 정해놓지 않는다.” 이런 말을 했죠. 우리가 살 때에 자유스럽게 사는 것과 죽은 사람도 체가 없이 사는 도리를 알게끔 된다면, 관습과 습이 없어진다면 자유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스럽게 하기 위해서 위패를 정해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냐하면 천리만리라도 손가락 하나만 끄덕하면 다 모이는데 왜 그것을 거기다 묶어놓고 있습니까? 그러면 공부하는 데도 지장이 있고 스님네들한테도 지장이 있고 여러분들한테는 물론이고, 그렇게 된단 얘깁니다. 그러니까 또 여러분들이 그렇게 공부를 못하고 그런 것만 알면 연방 찰나찰나 영령들이 이렇게, 조상님들이 집이 들으셨다가도 그 도리를, 집이 마음을 읽어보고 가시는 거예요. 마음을 읽어보시는데 마음이 그런 걸로다가 이렇게 접해서 집착이 돼 있으니까 똑같이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아예, 우리 여기 위패 있는 거 봤습니까? 위패는 당일 해서 당일 (소燒)하고 또 그 다음에 할 때 또 위패를 새로 해서 또 당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어떠한 자식들이 바깥에 나가 살거나, 부모들이 바깥에 살거나 이럭하면 부모를 모셔왔으면 잘 해드리고 노비 드려서 잘 모셔다 드리는 게 자유 아닙니까. 또 자식들이 살더라도 와서 부모를 찾아와서 저거하면 노비를 줘서 잘 먹여서 이렇게 해서 보내면 되는 거지, 자유를 갖다 강타하고 그냥 매어 놓는다면 그 문제, 뒷 문제는 어떻게 하리까.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 향은 양식을 삼아서 하는 겁니다. 촛불은 자기 마음을 밝히기 위해서고. 자기 마음을 밝힘으로써 그 조상들도 밝혀지니까요. 또 향으로다가 양식 삼으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도리를 알고 생각해야 체가 없는 그분이 그걸로 양식을 한다 이겁니다, 향으로. 그리고 물 한 다기 놓는 것은 정수를 말합니다. 정수를 말해서 이 정수에 입력되는 데 손색이 없으라고 하는 겁니다. 꽃을 한 다발 놓는다, 그것은 그 마음들도 모두 사람들의 꽃이지 마음입니다. 마음이 웃고 살라 하는 그 뜻에서 그 향기가 접합니다. 그거는 영령과 산 사람 자식들과 똑같이 그렇게 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그 자리에 있지 못해서 어떡하나’ ‘가보지 못해서 어떡하나’ 해도, 못 가게 돼서 못 가도 내 마음이 그렇게 돼 있으면 그냥 한 찰나에 그냥 마음의 도리를 읽고 한 찰나에 응접하십니다. 이 도리가 얼마나 광대무변한지 모릅니다. 이걸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서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죠. 그래서 ‘꽃 공양’ ‘다기 공양’ ‘향 공양’ ‘청수 공양’ ‘떡 공양’ 공양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일체 뭘로 쓰느냐 하면, 아까도 얘기했듯이 공생(共生)이며, 보이고 안 보이고를 떠나서 공생이며 공심(共心)이며 공체(共體)며 또 공용(共用)이며 공식(共食)이다. 이게 죽은 영령들이 내한테 그 마음을 읽고 찰나에 듣고 나고, 듣고 나고 이러기 때문에 그 조상들이 다 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체가 없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거든요. 부닥침이 없으니까 못하니까 산 자기 자손들을 영접해서…, 그 사람은 당사자는 몰라도 그냥 들어서 그 마음을 읽어서 배우고, 그 마음을 읽어서 배우고 이러거든요. 그것이 바로 보살행이자 보살이 응신으로 화해서 여러분들 앞에 그렇게 공부하려고 모두 애를 쓰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보이는 여러분들만큼 영령들도 조상님들도 여기 다 와서 계십니다. 여러분들 몸을 쫓아서 말입니다. 이 도리를 여러분들이 본다면 기막히고 아프고 눈물이 한없이 쏟아질 정도로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당장에 보이지 않고 이해가 잘 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기가 막힌 일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놓고 ‘상 옆에 또 물 한 그릇 놔라, 큰 그릇에다가’ 하는 것은 거기서 그 한, 정수 바다에서 말입니다. 바다에서 몸을 씻고 정수로 이루게 된다 이겁니다. 정수에 입력이 되면 그 입력이 다 현실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 겸해서 입력이 돼서 나오니까 과거를 문제를 삼을 게 하나도 없죠. 과거가 현실이 되고 미래가 현실이 되니까요. 이 도리가 아주 묘한 도립니다. 알고 보면 쉽고 모르고 보면 아주 복잡하고 그런 거죠.
그런데요. 그런 말 안 하셔도 되고요. 왜냐하면, 어떤 스님이 그러셨든 떡 하나를 아니 놔도 될 수 있는 거라고, 천도라는 것은 떡 하나를 아니 놔도 되고, 아니 놓고 할 수만 있다면 어느 스님이든지 안 놓고 해도 돼요. 하다못해 촛불 하나 없어도 마음의 촛불을 켜고 하니까요. 촛불은 보이는 것만 촛불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정말…, 그러면 아무 것도 놓지 않고 하면 먹을 게 없지 않으냐 그런다면, 왜 먹을 게 없습니까? 모두 차려서 먹지 않습니까? 집이네들이 먹으면 조상들도 먹고 집이네들이 굶으면 조상들도 굶는데. 아, 집이네들이 둘 아닌데, 모두가 이게 모두 같이 하시고 있는데, 응감을 하시는데 속의, 내 몸뚱이 속의 생명들도 다 같이 더불어 같이 응감을 하는데, 그것도 뭐이 걱정입니까? 응감을 안 하고 향으로 양식을 삼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도리를 알면 세상 천지가 바로 내 거가 됐다가, 처음에는 내 거가 됐다가 다 버렸다가, 다시금 주워 담아서 베풀어 주는 바로 부처님이 되셔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방편을 안 쓸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옛날에, 옛날 얘기 하나 하죠. 토굴에서 내려와서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나오니까요. 그 앞의 집에서 그, 미쳤다는 거죠. 그래 이렇게 보니까, 내려다보니까 왔다갔다 하고 그냥 막 부수고 그래요. 그런데 부수고 그러는데 그 뭐 어떻게 해야 그 사람네들이 알겠어요? 그러니까 합장만 하고 있었어요. 합장을 하고 있었더니 “때려 봤더니 인제 고만 해야겠다.” 그러고선 들어가더라고요. 그날부터 괜찮았답니다. 그래서 나한테 케익을 다 사오고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 먹고 상원사 토굴을 올라가려고 차를 타고 저 어디까지 갔는데 차를 꽉 막는 겁니다. 그래 차를 막아서, 어떤 사람이, 차를 막아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이 손이 전부 나환자처럼 전부 나서 영 시집도 못 가고 그냥 뭘 먹을 것도 할 수 없고 일도 할 수 없고 그렇다는 겁니다. 울면서 “스님은 이걸 하실 수 있을 테니까 꼭 스님 이걸 보고 가셔야지 안 보고 가시면 전 여기서 죽겠다.”고 그러곤 하더군요. 근데 그게 얼마나 급합니까, 차를 못 가게 하고 그러는데. 그래서 알았다고, 그저 난 할 줄 아는 말이 알았다고 하는 말밖엔 모르거든요. 그렇게 잘 알았으면 좋겠는데 알았다고 하는 소리밖엔 몰라서 알았다고, 정말 진심으로 불쌍했어요. 그래 알았다고 하고선, 인제 알았다고 하니까 그 사람도 빨리 길을 비켜줘요, 아주. 그게 알았다는 소리가 뭔 줄 알고 그렇게 빨리 비켜주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오면서도 생각을 했어요. 사람 사람이 모두 태어날 때 태어나기 전에 모두 일을 벌려놓은 것을, 그 집착하고 그러던 것을 그냥 가지고 나와서 또 살아서 이렇게 살면서도 또 고생, 죽어서도 고생, 죽어서도 내가 체가 없는 줄 모르고 체가 있는 줄만 알고 그러기 때문에 얻어 걸리거든. 몽둥이로 때리거나 철퇴로 때리거나 뭐 기름 가마에다 넣거나 이래도 그것이 우리가 체가 없는 줄 몰라서 그렇거든. 체가 없는 줄만 알면 그냥 벗어난 건데. 생시에 맞는 거나 죽어서 체가 없이 맞는 거나, 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아프죠. 이 모두가 한생각에 달린 겁니다.
그래서 그러고는 인제 어느 때쯤 됐습니다. 토굴에서 인제 또 내려오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내려오는데 아, 그쯤 갔는데 아, 그 여자가 또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아무 소리 없이 절을 세 번 하더니만, 차를 막아 놓고요, 절을 세 번 하더니 “그날부터 이게 다 떨어져서 나았습니다.” 이거예요. 그런데 내가 낫게 했습니까, 그 사람이 낫게 했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내가 없다면 그 사람도 없고 그 사람이 없다면 나도 없을 겁니다. 도리가 말입니다. 그래서 둘이 아닌 까닭에 여기를 들어왔다가, 예를 들어서 들어와도 즉 말하자면 두드러지지 않게 거쳐서 나가니까 나간 사이도 없더라, 이런 얘기예요. 그러고는 절을 하고 “인제는 시집을 가려고 그랬더니 시집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더라고요. 얼마나 글쎄 그것 때문에…, 그걸로 공부를 한 거예요, 아주.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어떠한 어려움이 생겨도 그걸 교재로 삼아서 그걸 공부로 해서 내가 체험을 하기 위해서 생긴 거라고 생각하시고 하세요.
- 이전글모든 게 갖추어져 있는 자기 근본을 믿고 21.10.30
- 다음글우리가 왜 사람으로 태어났느냐 21.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