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65_1999년 9월 5일 법회 모든 게 갖추어져 있는 자기 근본을 믿고
본문
질문: 제가 요즘 둘 아닌 도리에 대해서 상당히 깊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너만이 할 수 있잖아.’ 이렇게 들어갈 때는 참 편한데요. ‘둘이 아니잖아.’ 이랬을 때에는 뭔가 걸립니다. 그렇게 편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게 왜 그럴까?’ 그렇게 나름대로 관해본 결과 ‘아, 제대로 믿지를 못하고 있구나.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공덕을 설해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잖아.’ 하는 거는 진짜로 믿으니까 그렇죠? 또 ‘둘이 아니잖아.’ 하는 거는 즉 말하자면 믿지 못하기 때문에 ‘둘이 아니잖아.’ 이 소리가 나오죠. 결국은 우리가…,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유전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결과든지 다 유전에 의해서, 모두 대대로 유전으로 인해서 그렇게 수백 년을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고 수천 년을 내려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유전이라는 게 그 잠시 잠깐에 그 유전을 해치시킬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이 공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모두 어저께가 과거입니다. 어저께가 과거고 아까 한 시간 전이 과거니까 우리가 과거다 미래다 또는 현실이다 하실 게 없이 그대로 공해서, 그대로 공해서 우리가 항상 이렇게 하되 자기가, 자기가 하는 게 아니죠! 얼른 쉽게 말해서 물 한 컵을 먹었는데도, 내가 목이 말랐으면 내가 목이 마른 게 아니라 이 속에서 목이 말라서 달래서 먹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하면. 그러니까 내가 먹는 게 아니죠. 내가 보는 게 아니고 내가 듣는 게 아니고 모든 게 자기가 하는 게 아니에요. 오직 그것을 리더해 나갈 수 있는 근본에서만이 자기를, 모든 게 해나가죠.
그러니까 부처님을 처음에는 ‘저 형상이지.’ 이렇게 따지시지만 <일체제불의 마음> 그 노래를 해 놓은 것을 가만히 들어 보신다면, 해 보신다면 아실 거예요. 내가 몸이 몽탕 공해서 비었다면 저 부처님과 같다. 그러면 부처님과 같으면 모든 걸 갖추어(져) 있다. 모든 거를 갖추어(져) 있으니 못 볼 게 없고 못 할 게 없고 못 건질 게 없고 모든 게 다 그렇다. 이걸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그러니까 모든 걸 이 마음에, 나는 상대방을 불쾌하게 한다거나 또는 말을 잘못한다거나 이런 원인도 이 보는 눈이, 눈 하나가 잘못 보기 때문에 잘못 말을 하고 잘못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까까 눈으로 볼 때에 그냥 공체(共體)로 봐라, 공식(共食)으로 봐라. 아무리 강도라도 이쪽에서 강도가 아닌 사람이 강도를 볼 때 강도가 아니게 봅니다. 그러나 자기가 강도면 강도로 봅니다. 급하게 뛰어가는 걸 봐도 강도로 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곱고 탕 빈 사람은 그대로 악이든지 선이든지 그걸 가리지 않고 불쾌하게 하질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 인제 사찰마다 스님네들이 노비를 얻으러 옵니다. 근데 얻으러 오니까 싫죠, 얻으러 오니까. 얻으러 오니까 싫은데 그게 얻으러 오는 게 아니고 내가 전자에 졌기 때문에 주는 겁니다. 갚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아주 쉽죠. 그러니까 모든 일에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생각을 잘 해서 잘, 인의롭게 섭섭지 않게 잘 한다면 그건 모두 보살 케이스에 들어가는 거고 그렇지 못하다면 보살 케이스에 들질 못해요. 모두가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이 다 잘하기만 하겠습니까마는 잘하든 못하든 무조건 거기다 놓고 관해라. 거기다 놔 버려라. 그러면 니가 공해서 없다면 모든 게 없는 걸 증명할 수 있다. 함이 없이 하는 거니까 니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배를 탄 것도 아니고 배를 안 탄 것도 아니고, 내가 전자에 과거에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내가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갈 것도 없고, 이게 모두가 끊어진 상태죠.
예를 들어서 배우고 끊어진 사람은, 배워서 끊어진 사람은 한가하기가 짝이 없는데 망상도 버리지 않고 선한 것도 구하지 않는다 이런 게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선한 것도 구하지 않는다, 악도 버리지 않는다. 이래도 자기 그 가운데서, 자기가 그렇게 하질 않아요, 그런 걸 다 아니까. 저절로 자동적으로 모든 것이 다 둘이 아니게 되죠. 하다못해 날아다니는 새 하나 벌레 하나라도 다 둘이 아니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거를, 때에 따라서는 어떤 때 급하면 새들도 와서 일러 주고 이런 수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이 모두 날아다니는 새들도 그렇고 짐승들도 시각적으로는 다 잘 아는데 사람들은 요기서 요, 요 한 발짝 사이도 몰라요. 그래서 죽지 않습니까, 모두. 날아다니는 새들도 자기가 어떡하면 요거 맞으면 죽는다 하는 걸 알기 때문에 미리 가는 새도 있고, 짐승들도 미리 이렇게 탈출하는 짐승들도 있고 그런데 사람은 그걸 모르고 죽는다 이거죠. 그것들은 알고 죽는데, 힘에 겨워서 알고 죽는데 사람은 피하면 살 수도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알면서도 그냥 모르고 산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알게끔 다 해놨는데 왜 모르고 사느냐 이거죠. 그래서 고등동물이라고 그러죠. 사람은 수억겁을 내려오면서 그, 찢기고 찢으면서 먹고 먹히면서 살아온 것이 얼맙니까.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히죠. 그걸 생각을 안 하니까 그렇지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히죠. 기가 막힌데 나는 지금 왜 뭐가 급하냐. 이 봉지 속에서 내내 살겠느냐, 이 봉지 속에서 벗어나겠느냐, 한마디로 말해서. ‘이 봉지 속에서 내내 그 수없는 나날을 그냥 그렇게 살겠느냐. 탕탕 털고, 탁탁 털고 나서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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