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69_1999년 09월 19일 둘이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본문
질문: ‘나’가 없음이 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심으로 행하는 도리의 믿음에 갈 수 있는 올바른 가르침을 주십시오.
큰스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주고받고 삽니다. 더불어 살지 혼자 사는 사람 없어요. 옷도 더불어 같이 주고받고 입었고, 먹는 것도 주고받고 먹고, 모두가 일체가 다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둘 아니게 실천을 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둘이 아니라고 하느냐. ‘분명히 줬고 분명히 받았는데 어째 둘이 아니라고 하느냐.’ 이렇겠죠? 그런데 내가 전깃줄 얘기를 가끔 하죠. 전기, 전력이 들어왔을 때는 이게 불이 들어옵니다. 전력이 끊어졌다 이럴 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면에 전깃줄을 갖다가 이렇게 이어야 전기가 들어옵니다. 그렇게 들어오듯이 이것은 이거를 주고받을 때, 이걸 줄 때, 이걸 받을 때, 이게 한 순간은 같이 이 마음이, 즉 말하자면 정신계가 둘 아니게 이어진단 얘깁니다. 이어지니까 찰나,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단 얘기죠.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다. 그리고 함이 없이 살고 있다. 삶이 없이 살고 있다.
왜냐하면 방편으로 이렇게 표현을 할까요, 그전에 말했듯. 머슴을 사는데 자기네 집이 아니죠. 자기네 집이 아닌데 자기네 맘대로 할 수가 없죠, 머슴은. 주인이 맘대로 하죠. 그래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뿐이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랬듯이 주인이 이렇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내가 듣는데 듣는 순간, 주는 순간,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가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 대신 내가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항상 그, 한 찰나찰나마다 이게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이 없이 하게 된단 얘기죠. 그래서 자기 속에서 한생각이 나서 이걸 해야겠다 이러고 하는데도 함이 없이 하게 되고요. 남이 주는 거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은 사이가 없고 그 상대방도 준 사이가 없다는 얘기예요. 이거 이해가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이해가 모두 가셔야 될 겁니다, 아마.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가는데 이게 ‘둘이 아니다’라는 실천을 해야 할텐데 ‘둘이 아니다’라는 것만 말로 알고 있지 실천을 할 수가 없단 얘기죠. 항상 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이게 어째서 둘이 아닌가. 저쪽에서 나를 줬고 내가 저쪽에서 받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시죠. 근데 한순간에 전깃줄 닿는 거와 같단 얘기죠. 이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빨라요, 속도가.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속도가 빨라서 한생각에 그냥, 그저 갖다 놓고 ‘고맙다’ 고맙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고 하나로 그냥 이어지기 때문에 고맙단 말할 필요도 없이 그냥 고맙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슨 말을 하시게 되면 말을 하시고 그냥 가셔도 되는데 꼭 말을 들으려고 그러거든요, 뒷말을. 뒷말을 들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스님네들도 자기 몸은 시자로 쓰고 자기 정신은 부처로 쓴다 이런 말이 있죠. 그래서 항상 스스로서 ‘둘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을 실천을 하시는 데에 그게 묘미가 있다. 실천을 하시는 데는 어떻게 그러면 이루 생각을 하고 실천을 하느냐. 생각을 하지 않아도 본래 잠재해 있다면 그냥 해도 그게 둘 아닌 줄 알게 되는 거죠. 그냥 모르고 우리가 그냥 주고받고 이렇게 해도 그게 둘 아니게 그냥 실천이 됐다는 얘기죠.
질문: 무량한 법문 대단히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큰스님: 근데 우리가 지금 제일 문제 되는 것을 얘기하던 중입니다. 둘이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해야만 둘이 아니게 실천이 되느냐 이겁니다, 지금. 모두 내 몸뚱이 니 몸뚱이를 가지고 이렇게 실천이 되게끔, 둘 아니게 실천이 되게끔 된다면 일일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뿌리가 떨어졌다가 붙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 항상 자기 뿌리는 자기 뿌리가 가지고 있죠. 자기가 있는 데에 자기 뿌리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상대방이 나를 줘도 상대방이, 그 사람도 자기 뿌리를 가지고 있고요. 나도 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순간에 그 뿌리와 뿌리가 한데 합쳐버려요. 합치게 돼 있어요. 이 테레비를 끄면 안 나오죠. 테레비를 켜면 나오죠. 그렇게 자유자재해라 이 소립니다. 우리가 그냥 이렇게 하게 되면 벌써 둘이 아니게끔 된다 이 소리죠.
그래 처음에는 서투르지마는 그게 둘이 아니게가 되기 때문에 서툴러도 하다 보면 물리가 터지게 되고 자꾸자꾸 늘어 나가게 되죠. 이렇게 되면 생각 자체 하는 것도 요이하게 되고 생각하는 것도 유유하게 그냥 자연적으로 그냥 생각이 들고 말입니다. 왜 악한 것이…, 부처님께서도 얘기하셨지만 “악한 거나 선한 거나 둘로 보지 말라.” 이랬죠. 그거는 이 모두를 합류화시키는 데 있는 겁니다. 우리 몸뚱이도 나 하나로만 보지 마라. 수천, 수천 개가 이 몸속에 살아있다. 그것이 바로 네 모습이자 네 생명들이다. 그러니까 너 하나만의 모습을 보고선 너라고 그러지 말라, 이랬죠.
그랬는데 이게 말로는 이게 할 수가 없는 말이죠. 둘 아닌 도리를 어떻게 실천을 하느냐는 그 얘기는 내가 할 얘기가 아니죠, 사실은. 여러분들이 그대로 마음 놓고 생각 없이 그냥 ‘아, 이것 좀 먹어 보우.’ 이러고 이렇게 줬는데, 그냥 줬는데도 그냥 둘 아닌 줄 알아라 이거죠. 그걸 생각을 일일이 해서가 아니라. 둘 아닌 줄 알고 이렇게 줬어도 그렇고, 받았어도 둘 아닌 줄 알게 되면 이 받은 것이 저절로 이리로 대가가 그냥 가요. 가는 줄 모르게, 가고 오는 줄 모르게 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과응보를 모른다면 이 큰 도리를 모른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이 전 세계에서 지진이 일어난다 하는 것도 우리가 지진이 어떻게 해서 지진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죠. 그런데 그거를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그냥 덮여서 죽고 땅속으로 들어가서 죽고 모두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우리가 개미들도 보고 여러 가지 벌레들도 많이 보죠. 벌레 둥우리가 하나가 터지게 되면, 삽으로 탁 터지게 되면 그게 그냥 쫙 헤지면서 땅에도 묻히기도 하고 그냥 모두, 다리도 끊어지고 목도 끊어지고 다 죽게 되고 사는 놈은 살고 이렇게 되죠. 이런 거 보는 거나 우리가 지금 그게 지진이 일어나서 그렇게 죽는 거나 뭐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죠.
그래서 차원에 따라서 연쇄적으로 내려가는 거죠.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거, 그런데 그러지 마라. 오계를 받을 때 얘기했죠. ‘남의 생명도 내 생명과 같이 생각하라. 또는 내 물건과 같이 생각하라. 내 아픔같이 생각하라.’ 이렇게 모두 말입니다. 그래서 그 벌레들 그렇게 죽는 문제들요. 그냥 허청없이 밭에 가다가도 그저 이런 벌레들이 모두 꾸역꾸역 나오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탁 쳐서 그냥 버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산산이 헤어지고 죽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 문제가 자기 문제로 돼 버려요.
그런데 그게 고통이라고 그러는데 네가 한 거는 네가 그것을 해결해야죠. 자기가 해결해야 그게 맞죠. 그렇기 때문에 거기까지 간다면 자기가 고통을 받을 때 그거를, 모든 생명들이 그렇게 귀하다는 거를 생각하게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고(苦)를 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거는 자기가 진화되고, 살아있으면서도 진화되고, 살아있으면서도 생산이 되고, 살아있으면서도 길을 찾고, 살아있으면서도 길을 걸림 없이 걷게 될 때에 비로소 자유인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물론 이 모두를 잘해야 되죠. 스님네들도 염불도 잘해야 되고 뭐, 모든 거를 잘해야 되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마음들이 이거를 잘했다 하면 한 가지는 이렇게 빼놓고 해요. 빼놓고 하는 게 아니죠. 닥치는 대로 잘 해야 되겠죠, 어떤 거든지. 어떤 거를 막론하고 다 잘할 때에, 때에 따라서 길을 걷다가도 그런 일이 생기거든요. 그런 일이 생기면 자기가 항상 그냥 무심코 하던 거기 때문에 그냥 하게 되죠. 그냥 생각하게 되고요. 그냥 자기 하나의 생각뿐이 아니라 포괄적인 생각으로써 그냥 하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뭇 중생을 건질 수 있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지진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이런 공부를 해서 포괄적인 생각으로써 둘 아니게 생각한다면 모든 거를 다 건진다. 죽여도 건지는 거고 살려도 건지는 거다. 이게 사람이 한철 살다가 그냥 끝나면 그게 아닌데요, 한철 살다 끝나는 게 아니라 내내 이게 끝이 없이 돌아가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거를 죽었어도 그냥 건진다. 그리고 또 포괄적으로 생각을 잘할 때에 어떤 때는 종자가 덜 생기게 하는 이유도 있는 거죠. 우리가 집은 조그만 데다가 식구는 너무 많이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집이 터질 거 같으니까 종자를 다섯 에, 하나 하나 치면 열 개 스무 개를 낳아야 될 텐데 그냥 하나로 묶어서 낳는다. 이런 것도 되고요. 이런 것도 실천입니다, 이게. 모두가 실천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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