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68_1992년 12월 6일 내 마음의 문이란
본문
질문: '문이 많아 문이 없고, 문이 없어 문이 없다.' 하셨습니다. 한 점의 고기를 갖고 수많은 사람은 제각각 맛을 말하듯이, 서울로 오는 길은 동서남북 많지만 마지막 안방 문은 하나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된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큰스님: 질문 쳐놓고는 아주 가까운데 두고 질문을 찾으시는군요. 우리가 '문이 없어 문을 찾지 못하고, 문이 많아서 문을 찾지 못하고' 하는 소리는 우리 자체가 이거 말로 할 수는 없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다 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문이라 딴 데서 문을 찾아서는 아니 되죠. 내 마음의 문이란 천궁을 통하는 문입니다. 내 마음의 문이란 천궁을 통하는 문이기 때문에 문이 많아도 문 찾기 어렵고 문이 없어서 문 찾기 어렵고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 어디에 문이 있는가. 바로 내 빗장문을 열어야 열리는 거지 내 빗장문을 열지 않고는 열리지 않습니다. 대답이 알쏭달쏭합니까?
질문: 일체 생명은 자신을 위하여 이 생에 온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대중을 위하여 이 생에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같은 생각은 편견에 치우친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큰스님: 대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씨가 앉으면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또는 태양열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듯이, 다 이렇게 날려서 땅에 묻히기만 하면 나는 겁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역시 그렇게 태어나는 겁니다. 누가 낳고자 해서 낳고 낳기 싫으면 안 낳고, 이럴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냥 사랑의 씨앗이죠. 그냥 사랑하면 나오는 거죠. 사랑을 했다 하면 형성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씨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그 사랑의 씨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를 아시면 바로, 아까 얘기했듯이 그 문 안에서 문 바깥으로 나온 거죠.
질문: 제가 여우처럼 ‘오백' 이라는 숫자에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오라는 숫자는 자신의 근본과 우주의 근본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님 법문 중 ‘오백 명의 아들’ ‘오백 년을 여우의 몸을 받아’ ‘오백 나한’ ‘오백 년 후 다시 이곳에서 만날 때’ 등 많은 말씀에서 '오백' 이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 오백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합니다.
큰스님: 오백이라는 것은요, 이 우주 전체에, 한자리에 모두 무정물이든지 생물이든지, 어떠한 생명체든지 다 있는 것을 다 오백 자리라고 해도 됩니다. 오백이라는 것은 이 허공 이 자체 전체를 ‘오’라고 해도 되고, ‘백’이라는 것은 모든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찰나에 화(化)해서 돌아가니까, 공(空)해서 돌아가니까 백이라고 했습니다. 무(無)라고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숫자를, 오백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해서는 뜻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오백 년을 여우로다가 견디다가, 말 대답 하나 잘못해서 오백 년을 견디다가 할 수 없이 그 말대답을 다시 듣고 그 여우의 모습을 벗었다고 합니다. 근데 오백 년이 아닙니다. 어저께 만약에 여우가 됐다가 오늘 만약에 사람으로 된다 하더라도 그 사이가 불과 몇 시간 사이가 안 되고 일 초 사이라도, 삼 초 사이라도 오백 년이 됩니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해서 이 마음이 돌아가는 이 도리를 아셔야 그 도리를 모두 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자유스러운 마음, 자유스럽게 내가 벗어나는 마음을 갖는다면 벗어날 것이고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것이 자유스럽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숫자도 자유스럽습니다. 숫자는 사람들이 모두, 질서와 모든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생긴 거지 숫자가 따로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비행기가 프로펠러가 돌아가는데 숫자가 거기서 나오나. '?몇 번 너 돌아갔니' 이럴 수나 있습니까? 몇 번 돌아갔니? 몇백 번이 되니, 몇천 번이 되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거기? 지금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구가 말입니다. 우리 사람 사는 것도. 한 찰나찰나 이렇게 바뀌면서 그냥 돌아갑니다, 화(化)해서.
그런데 그것이 바뀌어서 돌아가는데 어떠한 것하고 가공이 돼서 이렇게 우리가 살 수 있나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과 그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살 수가 없죠. 공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죠. 공기가 모든 것을, 태양열을 잡아당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살 수가 없죠. 공기가 높이 뜨면 우리는 춥죠? 이 대기권을 벗어난다 하는 것도 이게 물로 싸여져 있기 때문에 물에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게. 물뿐이 아니죠. 네 가지가 합동이 돼야만이 그 모든 게 자유스럽게 딴 걸로다가 화해서 되니까요. 과학도 그래서 벌어진 거니까요.
질문: 고맙습니다. 진정한 보시와 인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인연을 맺는다고 맺는 것인지, 또 어떤 대상과 인연을 맺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되는 건지요?
큰스님: 끝까지 왜 책임을 집니까? 우리는요, 지나가다가 한 번 "만났어" 그러고 지나가다 악수 한 번 하고 지나가는 폭밖에는 안됩니다, 살아나가는 것도. 그런데 거기에다가 악수 한 번 했다고 집착을 한다면 그거는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집착을 하지 마시고 그대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겸손하고 의리 있고 도의, 그걸 벗어나지 않게 자기를 자기가 다스리면서 모든 것을 부드럽게 해나가세요. 그것이 선행입니다.
질문: 끝으로 질문 올리겠습니다. 공부가 많이 됐다는 사람한테서 말과 행동과 모습이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걷잡을 수 없이 감정적으로 모두 나온다면 이것도 가르치기 위함으로 봐야 되는 건지요. 큰스님의 따뜻한 답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큰스님: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들은요, ‘옆눈을 보지 마라’ ‘옆을 보지 마라’ 이랬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요, 나도 한때는 그렇게 지내봤습니다마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옆땡이에서 잘못하든 잘하든 그거를 개의치 마라 이겁니다. 왜냐? 옆땡이에서 잘못하는 거를 보더라도 여기다, ‘너하고 나하고 둘이 아닌데 바로 내가 전자에 몰랐을 때 그 내 모습이었다.' 한다면 이것이 그냥 억지 말이 아닙니다. 수없이 바뀌어서 돌아왔으니까요. 수없이 바뀌어서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들이 있다면 그 못났을 때 그 모습, 잘났을 때 그 모습, 못했을 때 그 모습, 형편없는 그 모습이 모두 자기가 거쳐 올라온 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모든 게 한마음에다 모든 걸 놓고 ‘둘이 아닌데 너도 그렇지 않게끔 하는 것도 한마음 주인공이 아니야?’ 한다면 그쪽도 바뀌어집니다. 바뀌어져요. 그거는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이게 바뀌어져야지, 말로 육신으로 이렇게 해서 외려 더 업을 짓는 거지 그건 안 통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모든 거를 놓고 가야만이 다 버려서 다 얻는 거죠. 만약에 요거 잘못된 것 보이고 저거 잘못된 것 보이고 이러다가는 언제 그 길을 갑니까? 언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을 다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깐 남이 잘하는 거 못하는 거 보기 이전에, 그걸 봤으면 보는 대로 그냥 주워 넣어요. 그냥 보는 대로 주워 넣으라고요. 그리고 부드럽게 해줌으로써 그냥 한바다가 되죠.
질문: 이것으로 질문을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큰스님 건강을 빌며 새해 좋은 법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내 건강을 염려하신다면 여러분들의 몸도 건강하실 겁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들의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체들이나 내 몸뚱이에 있는 생명체들이나 다 둘이 아닌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 이전글둘이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 21.10.30
- 다음글자기 마음이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21.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