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지켜나가는 계율 > 주제법문

주제법문


주제법문-97_1986년 1월 29일 스스로 지켜나가는 계율

본문

질문: 질문드리겠습니다. 다른 스님들은 계율에 대해서 가끔 중요시 말씀하시고 그러시는데 스님께선 계율에 대해서 특별히 말씀하신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법문 중에서 조금씩 말씀하시고 그랬는데, 계율과 깨달음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한번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계율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계율이 다 있는 것입니다마는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벌써 자기가 상식과 교양, 교육 다 받고, 잘못된 것 잘된 것 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벌써 그것은 근본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말은 안 해도 좋지만 사회에서 사시는 분들은 사회의 계율이 있고 질서가 있고 상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승려들이 사는 도량에는, 도량은 또 여러분들이 사는 데나 우리 승려들이 사는 도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도량하면 전 우주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 도량에서 사는 승려들은 승려들대로 계율이 있고 그렇지마는 그 계율 무시하고 공부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 계율도 거기에 근본적으로 밸런스가 맞아야지, 만약에 맞지 않는다면 그건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근본적으로 상식을 알기 때문에 내가 절에 들어가면 절의 계율을 지켜야 하고, 들에 나가면 들에 나가는 대로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얘깁니다. 계율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시켜서 하는 군대식 같은 그러한 계율이죠, 절간에는요.

 

그렇지만 사회에서는 그렇게 어느 회사에 들어가거나 거기는 계율이 없습니까? 모든 게 계율은 제가끔들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계율이 따로따로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계율을 지키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차를 피해서 우리가 보도로 간다. 차 속에 들어가지 말라니까 우리가 안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죽을까 봐 안 들어가요. 그건 저절로 그렇게 돼 있죠? 차가 오는데도 무조건 내가 차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죠? 차를 피해서 내가 또 갑니다. 그것이 바로 계율이에요, 근본적인.

그러면 집안에서도 그럽니다. , 이건 더러운 것은 좀 더 훔치고 깨끗하게 씻고 다듬어 놓는 것도 계율, 또 모든 것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계율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 사는 것이 계율에 의해서, 우린 올바르게 살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행한다 이 소립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돼 있어요. 여기 오신 분들에 한해서는,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에 한해서는 돈을 천만 원을 주고 오늘 강도질을 한 번 하라고 그래도 못해요.

 

계율을 그렇게 지키지 않는다고 하기 이전에,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 이걸 떠나서 우리는 계율을 지금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태여 계율이다’ ‘아니다그런 말을 붙일 필요가 없죠. 그리고 요것을 계율에다가 딱 얽매어 놓는다면 저 이북의 김일성처럼 딱 묶어 놓는다면 이건 독재! 자유 계율이 아니라 독재! 이러면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계율 속에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죠, 강제 계율 속에서는. 그래서 지금 미국에 가 계신 행원 스님이 중국으로 순례를 하시는데 거기 선맥이 끊어진 듯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제, 강제 계율이란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마음이 자유스러워야지, 노동을 하면서도, 죽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자유스러워야 공부가 되는 거지 강제 계율을 받으면서 어떻게 공부가 됩니까?

 

그리고 그저께 좀더 식탐을 하지(갖지) 마시라한 것도 그것도 역시 우리가 공부를 하려면 외로워야 하고 고독해야 하고 배고파야 하고 얻다 기댈 데도 없을 때에 우리는 그 자기의 생명수가 홀연히 나서 맛을 보는 거지, 배부르고 호화롭고 안락하고, 마음이 이래서는 거기에 일심으로써 그 철벽을 뚫을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있어도 바로 자기 게 아니고, 먹을 게 많아도 자기 게 아니고, 호화로워도 자기 게 아니고, 모든 게 자기 것만은 아니다 이겁니다. 일체 같이 돌아가고 있으니 언짢아할 것도 없고 또 슬퍼할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이 항상 마음을 중도에다 두고 중심을 지키면서 해 나갈 수 있는 그 공부가 필요한 거죠.

 

그리고 우리가 계율, 이 자체가 말입니다. 계율이라 하면 이런 게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공양을 끝내고, 또는 아침에 몇 시부터 예불을 올리면 그다음에 법당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또 몇 분, 5분이면 5, 10분이면 10, 30분이면 30분 좌선하고 앉아 있는 거, ‘참선한다이런 계율. 또는 오늘의 요 짜임새가, 소임을 맡은 사람들의 짜임새가 똑똑 떨어지게 요렇게 돼 있는 것을 계율이라고, 이름 해서 계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승려라면, 또는 승려라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아침에 일어나시면 으레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 씻고 여자는 밥한다.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뭣을, 뭣을 하고 나는 내 몸에 있는 모든 것을 처리하고 나는 몇 시간이면 벌써 어디까지 간다. 회사에 나간다. 장사를 한다. 이런 시간을 맞춰서 나가는 것도 역시 그것도 이름 붙이다 보면 계율이죠. 그러고 나가서도 올바로 해야만 그게 계율이죠. 우리가 올바로 못하는데 어떻게 계율이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상식화 돼 있단 얘깁니다, 근본적으로. 그런데 그거를 시간을 요렇게 요렇게, 요때는 요거를 하고 요땐 요거를 하고 요땐 요거를 하고, 요렇게 짜 놓는 것을 계율이라고 이름해서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여러분들은 입산한 분들도 아닌데 뭐 계율, 계율 이런 거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가정에서 계율을 지키면서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것만 아마 철두철명하게 하셔야 될 겁니다. 그것도 참선이니까요. 어느 거 하나 참선 아닌 게 없습니다. 똥도 옆으로 누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고, 똑바로 누면 쏙 똥이 들어가니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시죠. ‘무슨 계율을 지키랬으니까 난 똥을 올바로 눠야겠다.’ 이럽니까? 똥 눌 때도 그냥 저절로 , 한데다 누면 안 되지. 삐뚤어지면 저기 묻으니까.’ 그리고 가래침을 뱉으면 모두 더러우니까.’ 이렇게 스스로 계율을 지키는 겁니다.

 

이게 전부 우리가 교양이나 교육이나 또는 상식이나 이런 걸 가지고 우리는 그대로 이렇게 계율을 지키고 나가는데 인간 자체가 그래서 첨단을 넘고도 남음이 있다고 봅니다. 이건 벌써 그 재력을 아주 충만하게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앉아서 이 우주를 그냥 굴릴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한 굴릴 수가 있는 능력을 여러분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계율 따위 그런 것은 거기에 포함해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말입니다.

목록

대한불교조계종 한마음선원(13908) 경기 안양시 만안구 경수대로 1282Tel. 031-470-3100Fax. 031-470-3116
Copyright (c) 2021 HANMAUM SEONWON. All Rights Reserved.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