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한 후도 경계에 걸리나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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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한 후도 경계에 걸리나요?

본문

질문

늘 함께 계심에 감사 드립니다. 견성을 한 후에도 경계가 닥치면 마음이 일어나는지요. 예를 들어 경계에 닥쳐서 때때로 화가 나고 놀라고 걱정하고 이러한 것을 다시 놓아가야 하는 것 인지요. 그래서 경계에 여여해지는 것이 성불인지요. 말하고 보고 생각하고 하는 이것이 근본임을 느꼈습니다. 모든 생각이 근본에서 나온 것임을 느꼈습니다. 그 생각에 집착하여 근본을 놓쳐왔음을 느꼈습니다. 근본은 청정하지도 탁하지도 않음을 느꼈습니다. 깨달았다는 생각마저 놓고 있습니다. 가르침 바랍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습을 떼지 못한다면 깨우쳤다 하더라도 다시 미(迷)해지는 그러한 연결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우치기는 쉬워도 성불하기 어렵고, 성불하기는 쉬워도 열반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 세 단계 없는 세 단계를 꾸준히 나갈 수 있다면 생과 사가 그대로 열반과 둘이 아니다 이 소립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얘기하듯이,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또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 일체 만법이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즉, 모든 작업이 나로 인해서 벌어진 거니까 나를 다스리면서, 처음에는 무조건 용광로에다 헌 쇠 넣듯 모든 것은 거기서 이끌고 가고 일체 만법은 거기서 들고나는 거니까 거기서 하게끔 놔라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발견했어도 수억 겁을 거쳐 나오면서 악업 선업에, 즉 말하자면 성냄과 착과 욕심이 그냥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둘이 아닌 거를 확실히 알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활하며 배우면서 지혜롭게 둘이 아님을 알아야 영계성이나 유전성 같은 것이 내 앞에 닥친다 해도 대치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바로 거기에 놓고 가되, 안에서 어떠한 것이 나오더라도 거기에서 나오는 대로 맹종하지 말고, 예를 들어서 나를 발견해서 볼 때에 나를 넓혀서 생사윤회에 끄달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말하자면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고 주장하는 그런 안의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의 경계에 맹종하지 말고 누가 되지 않는 일은 듣고 누가 되는 일은 듣지 말고 버리라는 게 아니라 하여튼 나를 테스트 해 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감사하게 생각하고 거기 또 놔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경계에 맹종하고 또 거기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안으로 기울어지고, 밖에서 끄달리고, 밖으로 떨어진다면 밖의 경계에 또 끄달리고 기울어지고, 그러니까 안이나 밖이나 맹종하지 말고 모든 이치를 눈으로 보고 듣고 모든 것을 내가 주장해서 결정짓는 데에 양면이 다 총괄이 돼서 그대로 법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야 만이 모든 경계나 망상 같은 것에 끄달리지 않고, 그대로 생각하면서도 걸림없이 자기가 주장자를 올바로 세우고 이끌어 나가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둘 아닌 도리를 체득해서, 만약에 구렁이가 “나를 구원해 주시요.” 한다면 부처님의 마음은 구렁이 속으로 들어가서, 말하자면 모든 문을 활짝 여시고선 그거를 안아들인다면 두드러지지도 않으면서 자기 모습이 바로 그 모습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구렁이가 돼 버리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사람이 건져달라고 할 땐 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고, 저 사람이 건져달라고 할 땐 저 사람 속으로 들어가고, 또 돼지가 살려달라고 할 땐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가, 소가 살려달라고 하면 소의 속으로 들어갔다, 말의 속으로 들어갔다 또 하다 못해 풀 속으로도 들어갔다, 나무 속으로도 들어갔다, 목신도 되고, 구더기 속으로도 들어가서 구더기도 되니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부처다 이겁니다. 그게 바로 구경각지(究竟覺地)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도 이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불이법(不二法)은 “이게 옳습니까, 저게 옳습니까?” 할 때에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 소리 없이 여러분이 가정에서 불을 밝히려고 스위치를 누를 때에 "불을 켜야 옳겠습니까? 안 켜야 옳겠습니까?" 그러고 불을 켭니까? 아니시죠? 전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벌써 가설이 됐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대로 불만 켤 뿐입니다. 그리고 방바닥에 물이 떨어졌으면 그대로 아무 소리 없이 걸레 갖다가 훔치는 것뿐입니다.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도 아무 소리 없이 그저 냉장고 문 열고 먹거나 물을 마실 뿐이지 거기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목이 말라서 물 달라는데 이유가 뭐가 붙느냐 이겁니다. ‘내가 먹어야 옳으냐, 안 먹어야 옳으냐.’ 그러고 누구더러 물어보고 먹습니까? 그리고 또 물더러 물어봅니까? 내가 너를 마셔야 하느냐, 마시지 말아야 하느냐, 이러고 물어보고 먹습니까? 목마르면 그냥 마시는 것입니다.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불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가 붙지 않는 데서, 나라는 걸 세우지 않는 데서, 바로 구경경지를 이루어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삼 단계의 문제, 바로 삼 단계 아닌 삼 단계의 도리로, 삼 단계도 없고 일 단계도 없다는 그 사실을 그대로, 여러분이 자기 탄생을 한다면 모두 삼계를 통달하게 될 수 있으며 바로 통달했다는 이름도 없는 그런 통달이 온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구경경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으로 머무르지 말고 더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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