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마음이 번잡한지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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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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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마음이 번잡한지요?

본문

질문

저는 평소 스님 법문을 현대불교 신문과 한마음 요전을 통해 보고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불자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자리가 어떤 것인지는 분명히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낌은 옵니다. 욕심과 분노에 안절부절하는 내가 있고, 그 이면에서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내가 있고, 그리고 마음이 편안할 때의 나도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알려고 애를 쓸 때의 나도 있고, 지하철 역 앞의 거지에게 100원짜리 잔돈을 주는 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 항상 그 마음이 그때뿐입니다. 참나를 찾아서, 보리심을 내었는데 돌아서면 잠시 예전과 똑같이 또 욕심부리고, 화내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는 일상의 나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법당에서 108배를 하거나, 불보살님의 명호를 욀 때는 마음이 평온합니다. 그러나 법당 문을 돌아서서 나오면 예전과 똑같아집니다. 그래서 마음공부에 진척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번잡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제 자신이 조울증이나 심리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본인이 얘기하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마음이 찰나찰나 변해서 돌아가는데 무엇을 내가 했다고 하며, 무엇을 내가 가졌다고 하며, 무엇을 내가 줬다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도 내 것 아님이 없고 남의 것 아님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모두가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돌아가는데, 길을 걸어가는데 발자취를 짊어지고 다닙니까? 아니죠? 한 발 떼어놓았으면 금방 앞서 발자국은 없어지고 과거로 돌아간 발자국도 없는 겁니다. 그리고 발자국 딛고 걸어온 사람 자체도 공해서 없습니다.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어서 돌아가는데 언제 왔다고 하고 언제 갔다고 하며, 어떤 거를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하고, 어떤 걸 먹었을 때 내가 먹었다고 하며, 누구를 만났을 때 내가 만났다고 하며, 어디를 내가 갔다고 하며 어디에 내가 왔다고 하겠습니까? 모두가 공했으니 그냥 길을 걸을 뿐이요, 먹을 뿐이요, 만났을 뿐이요, 말할 뿐입니다. 그냥 묵묵히 말입니다. 그렇게 찰나찰나 말을 하고, 찰나찰나 듣고, 찰나찰나 책을 보고, 그렇게 찰나찰나 말을 하고 만날 뿐이죠.

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어떻게 상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존재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로부터 없는 문을 발견하라고 하는 겁니다. 나로부터 내 불성이 그대로 여여한 것을 알고 중용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믿지 못하고,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면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니 그게 발전이 있겠습니까? 늘 얘기하는 거지만, 아무리 108배를 하고 만 배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냥 몸으로 한 것이라면 아무런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 배를 올리더라도 삼 배를 올리더라도 일체를 하나로 둥굴려서 공심으로 하는 절이라면 그건 우주 천하를 울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대로 불성이 있다는 걸 알고, 불성이 있는 고로 여여한 줄 알고, 또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 손색이 없고 걸림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고, 자유자재권을 그대로 모두 소유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핏물이든 빗물이든 똥물이든 모든 물이 바다로 한데 합쳐서 모입니다. 깨끗한  물이든 구정물이든 어떤 거든지 말입니다. 옛날에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젖는 것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마는 모든 물이 바다로 모이면 그게 수증기로 올라가서 다시금 내려줍니다. 이게 생수입니다. 그래서 저 풀 한 포기도 그 생수를 마시고 삽니다.

근데 그게 참 묘한 것이,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먹고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먹더라 이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작은 거는 아주 작은데도 그냥 먹더라 이거예요. 그러니 부처님이 평등한 공법으로 아무리 우리를 건져주셔도 그릇이 작아서 먹지를 못하고 받지를 못하는 걸 어떡합니까, 그릇대로 받는 거지. 그러니까 평등하게 부처님께서 모든 만물에게 비를 내려주셔도 자기 그릇이 요만하다면 고만큼밖에 못 먹는 거죠. 크면 큰 대로 먹고 작으면 작은 대로 먹구요. 그러니 누구 원망을 하겠습니까. 누구 탓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난 탓이요, 자기 그릇이 작은 탓이요, 또 넘치는 건 그릇이 큰 탓이니까 넘치지도 말고 적지도 말고 항상 중심을 가지고 중도로써 중용을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내 한마음 속에서 다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 찾고 저것 찾고 그렇게 바깥으로 뱅뱅뱅 돌다보면 세월 다 가고, 그러다 보면 벌써 옷을 벗게 되는 거죠. 모습이 없으면 부딪힘이 없어서 공부를 못합니다. 체가 없어서 공부를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생에 이 몸이 스러지기 전에 기필코 우리는 그 소식을 알아야 되고, 공부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냥 말로 ‘마음공부’ 한다고 말하지만 일거수일투족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해야하는 거고, 또 자기가 있으니까 생활이 있는 거지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더불어 같이 하는 둘 아닌 도리에 대해서 아시고 모든 걸 한 군데다 보림을 해야 하는 거죠. 용광로에 모든 쇠를 집어넣어서 새로운 쇠로 만들듯이 그렇게 몽땅 놓아서 새로이 입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도 얘기했듯이, 바닷물이 수증기가 돼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올 때 걸러져서 정말 생수가 돼서 생명을 살리고, 우리는 다 그 물로 하여금 살고 있는 것이니 일체가 공식(共食)을 한다는 겁니다. 공식이다 해서 먹는 것만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거든지 집어삼키라는 뜻입니다. 앞에 닥치는 거 마다하지 않고 집어삼키고, 가는 거 잡지 마라 이 소리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요, 그것이 바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임을 알고 화가 나든지 편안하든지 어떤 경우이든 그 자리에 놓고 맡기는 공부를 하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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