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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부처의 삶인지...

본문

질문

항상 보이지 않게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 본래 부처인 그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어요. 어떤 것이 부처의 삶인지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예전에 통선사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통스님이라고 하는데, 그 분은 5만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항상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호랑이한테 잡혀간다 하더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사는 길이 있느니라. 모든 일은 순조롭게 응하되 거스리지 말고 호랑이가 잡아먹으려 하더라도 순순히 먹혀라. 살고 죽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스님이 산을 지나가다가 천야만야한 산턱에서 대호(大虎)를 만났습니다. 기절을 할 지경인데 문득 그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서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는데도 순리적으로 거역하지 않고 그냥 잡아먹혔습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가 씹지도 않고 삼켰는데 이 스님이 떡 고개를 들고 천장을 쳐다보니 아, 뭐가 달렸거든요? 주머니 하나가 달린 겁니다. 그래서 항상 지니고 있는 장도를 꺼내서 쓱 도려냈습니다. 뜨겁거나 춥거나 그래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으니 마음을 독하게 먹고선 칼을 쓱 꺼내 가지고 간을 한 점 도려서 꿀떡 삼켰단 말입니다. 그랬으니 이거는 요새 말로 오토바이 타고 막 돌길을 가는 거와 같이 날뛸 거 아닙니까. 호랑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거든요. 그러자 또 한 점을 썩 베어서는 또 꿀떡 삼켰습니다. 아, 꿀떡 삼키니까 또 뛰거든요.

바깥에서는 호랑이가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면 호랑이의 증조할아버지가 “얘! 너 왜 그렇게 뛰니?” 하니까 그냥 물어 죽이고, 할머니가 “왜 그렇게 뛰니?” 하고 물으면 또 물어 죽이고, “아버지, 왜 그렇게 뜁니까?” 하면 물어 죽이고, 사방으로 하늘이 높다고 뛰면서 다 물어 죽여 버리고 있는 겁니다. 그걸 죽이려고 죽이는 게 아니죠, 아프니까 그런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다 죽여 버리고 자기도 고만 죽게 됐는데, 거기에서 간을 뭉텅 떼어서는 소금도 바를 새 없이 아예 꿀떡꿀떡 삼켜버렸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그냥 꿀떡꿀떡 삼켰습니다. 그렇게 삼키고 나서 나중에 보니까 조용하거든요. 조용하니까 자기 장도로다가 꽁지를 둥그렇게 뚫고서는 쓱 나오니까 머리가 훌떡 다 벗겨졌더란 말입니다. “다 벗겨져서 참 싱그럽구나.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보고, 내가 살면서 스님이 하신 말씀도 건성 들었더니 참 싱그럽구나. 모두가 번뇌망상을 먹고 산다고 했더니 모두가 싱그러운 그 법력을 먹고 살았구나. 그러하니 망상이라고 떼어 버릴 것이 뭐 있으며, 망상이 아니라고 가질 게 뭐 있던가! 푸르고 높은 산 얕은 것을 산이라 하노라.” 하고선 내려간 겁니다.

산에서 내려가서 통선사와 제자 5만 명이 죽 늘어앉았는 데에 이 스님이 들어가서 은사 스님한테 떡 삼 배를 올리고 나서 하는 소리가, “독 안에 들어서는 독을 굴릴 수 없노라. 독 바깥에 나오니 굴리고 굴려도 굴리는 자체가 없더라. 한 손 한 발 딛고 한 손 들어 천지를 쥐고 한 손 들어 해와 달을 걷어쥐니 일체 푸른 산 푸른 초목들은 한데 걷어 모아서 상투를 틀고 내 석장을 빼서 동곳을 삼으니 이 천지 어찌 싱그럽지 않으랴. 여기에서 그 동곳 한 점이, 5만 명이 오천이 될 수 있고 오천이 한 점이 될 수 있고, 그 한 점이 바로 여기에 부처님 한 분이 계시노라. 모두 일어나서 같이 한 손 들고 한 발 딛고 절하라.” 하고선 버럭 악을 쓰면서 참 공손히 자기 은사스님한테 절을 하거든요, 합장을 곱게 하면서. 그러니 스님께서 “저 산이 항상 푸르다고만 했더니 붉게 익었구나. 붉게 익었으니 흰 구름도 검은 구름도 다 걷혔구나. 얼씨구절씨구 좋을 씨구, 우리 살림살이 이만하면 좋을 씨고.” 하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이 소리를 허투로 듣지 마세요. 우리가 세상을 산다고 하지만 남녀를 막론해 놓고 이 도리를 모른다면, 이렇게 된다 저렇게 된다는 말도 할 수 없으리만큼 치욕스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창살 없는 감옥에서 세세생생 헤맬테니 그 노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수차 얘기를 하는 그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부엌에서 일할 때는 아무 옷이나 입고 일하다가도 외출을 할 일이 생기면 금방 탈바꿈을 해 가지고 바깥에 나갑니다. 구두를 신고 온통 바르고, 모습을 확 바꿔 가지고 말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렇게 바꿉니다. 어느 장소에는 이렇게 입고 가고 어느 장소에는 저렇게 입고 갑니다.

이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신령스러울 만큼 모습을 바꿔가면서 살고 있고,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얼굴이 찌그러지고 눈을 부릅뜨게 되고, 속이 안 상하고 태평하고 즐거우면 해바라기처럼 즐겁게 웃고, 또 너무 화가 나서 부득부득 뭐가 일어나면 막 부수는 행동도 하게 됩니다. 화를 냈으면 화를 낸 대로 행이 나오고, 웃을 때는 웃는 대로 행이 나오고, 울 때는 우는 대로 행이 나옵니다. 그 행이 바로 탈바꿈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하나 모습 자체도 변해가면서, 물건이 전부 부서지고 변해가고 없어지고 이렇게 하는 것도 일체 만법이 다 똑같다는 얘깁니다.

항상 말했듯이 귀로 듣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습니다. 내가 예전에 산에 다니면서 봤는데 토끼란 놈이 말입니다. 잿빛을 하고 있다가도 추운 겨울에는 잿빛 나는 털을 하얗게 탈바꿈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이렇게 묘한, 짐승들도 자기가 살 궁리들을 하면서 탈바꿈을 하는데, 사람이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만 있는 게 아니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럼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입니까? 부처는 이름입니다. 대의적인 이름일 뿐입니다. 여러분 각자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낳고 나서 이름을 지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도 한 번 빙그르르 돌아서 나와야지 돌지 않으면 나오질 않아요. 그 원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 천지가 그렇게 돌고 있거든요. 마음도 그렇게 안으로 굴리면서 돌아야 바로 내가 생산을 하게 되는 거죠. 내 마음을 내가 생산해서, 내가 또 안으로 체험하고 안으로 굴려서 두 번 없는 두 번의 생산이 됐을 때, 비로소 너와 나와 둘이 아닌 죽음이요, 다시 한 번 너와 나가 나툴 때, 세 번 없는 세 번의 죽음이요, 우리가 지금 참나를 발견한다, 마음을 깨닫는다, 도인이다 하는 말이 있기 이전에 말입니다. 순박하게 못났든 잘났든 내가 생각하면서 나를 화두로 삼지 않는다면, 그러고 24시간 자나깨나 그것이 전체가 다 참선이요, 싱그러움이요, 법이요, 묘한 도리입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거듭거듭 모습을 바꿔서 억겁을 거쳐서 이 세상에 거듭거듭 나오면서 이렇게 아픔과 쓰라림을 당했거늘 어찌 오늘날에 인간의 몸을 받아 가지고도 그것을 모릅니까. 지금 살면서도 모릅니까. 지금 복장을 치면서 아파서 울면서도 모릅니까. 우리 살림살이가, 불법과 우리 살림살이가 둘이라면 어불성설입니다, 이건 있을 수도 없어요. 살림살이 빼놓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무엇을 일컬어서 도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도라는 것은 이 길, 저 길, 같은 길입니다. 이 길도 아니고 저 길도 아니고 동(同)길이라는 소립니다. 내가 나오기 이전을 미분전이라고 하는데 천만에요! 낳기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닙니다. 오직 지금, 내가 여러분과 예전에 앉았던 그때와 지금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듣는 것과 말하는 것과 둘이 아닌 겁니다.

이 도리를 우리가 모른다면 상대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그 이치를 한데 끌어 모아서 우리가 바꿔 가지고 돌아가는 찰나찰나를, 망상이라고 하지말고 끊으려고 하지말고 자기한테서 나온 거 자기한테 놔라 이겁니다. 맡겨 놔라 이겁니다. 그래서 창살이 없는 자기 마음 가운데의 창살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마음의 항아리를 굴릴 수가 없습니다. 자유스럽게 굴릴 수가 없어요. 그러고 내 한 점의 마음을 가지고 수천 가지로 화하고 수천 가지로 나투면서 찰나찰나 그 묘법의 진의를 알지 못할 겁니다. 그저 “부처님이 어떤 것입니까?” 하면 “너 나오기 이전이다.”고 하면서 그것만 염하게 하는데, 이렇게 해 가지고 첨단의 과학이 발달된 이 시점에서 깨우쳐질까요? 천 년을 해 보고 만 년을 해 본들, 자기 자신에게 모든 걸 물어보면 알 거예요.

그래서 자기 열매를 자기가 무르익혀서 사람들을 줬을 때 모든 사람들이 “아! 그 맛 좋더라.” 이러고 자기 그릇대로, 자기 차원대로 맛이 나는 거를 말할 때 비로소 만 가지 맛이 나는 겁니다. 나와 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더불어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선연(鮮姸)한 부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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