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위해 관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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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는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입니다. 마음공부 한 지는 오래 되지 않아서 스님 말씀하시는 것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스님께서는 주인공을 무조건 믿고 몰록 맡기라고 하시는데 제가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주인공! 저 사람들 얼른 낫게 해줘.” 아니면 “당신이 낫게 해 줘야 될 거 아냐?” 이렇게 관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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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낫게 해달라고 하는 건 벌써 둘로 나누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너만이 이끌어 나가고 병도 낫게 할 수가 있어.” 하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자들과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까지도 거기다 맡겨야 해요.
왜냐 하면은 우리가 모르니깐 지금 맡겨라 굴려라 이러는 거지 본래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고 만나고 이러는 게 그대로 법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만나는 게 문제가 아니거든요.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게 문제죠. 말을 해서 마음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면 행동으로 개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하다보면 저절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거지 매달려서 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좌선이라는 것도 마음이 안정돼야 좌선이지 마음은 온통 끄달려서 산란한데 육신만 앉혀 놓는다고 해서 그게 좌선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냥 좌선이지 참선이 될 수가 없다 이 소리입니다. 행선이나 와선이나 입선, 즉 말하자면 일을 할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다 참선이 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놓고 가라고 하는 것은 본래 우리가 고정됨이 없이 화해서 나투면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르면 금방 아버지 노릇 하고, 부모님이 부르면 금방 아들 노릇 하고, 또 아우가 부르면 금방 형님 노릇 하고, 형님이 부르면 순간 아우 노릇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찰나찰나 돌아가는 자체가 그대로 여여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냥 여여하게 가는데 마음으로 집착을 해 가지고 못하느니 잘하느니 하면서 야단법석들을 하니까 그게 바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셈이나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걸리지 말고 그렇게 열심히 해 보세요.
그리고 남을 간호를 한다고 해서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저 사람이라고 그러면 벌써 상대가 되잖아요? 그런데 모습은 둘일지언정 어찌 마음이야 둘이겠느냐 이겁니다. 전구는 여러 개가 있지만 전력이 어찌 둘이겠느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모습을 보지 말고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어!’ 하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안 그랬을 때와 그랬을 때는 그냥 판이하게 달라지는 겁니다, 전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 보세요. 얼마나 교교하고 묘하고 광대무변한지 스스로 알게 돼 있습니다. 내가 왜 놓으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이것은 그냥 현실에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 차원을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차원에 의해서 죽어도 업식은 꼭 따라다니거든요. 업식이 고만 조절이 돼 가지고는 현재 사는 걸로 나오는 거예요. 물질적인 컴퓨터는 입력을 해서 빼 쓰지만은 자동적인 컴퓨터는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버려요. 그래서 입력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대로 내 앞에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되돌려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질 것 아닙니까? 얼마나 쉽고 빠른 길입니까? 이 마음의 길을 걷지 않고는 그 도리를 알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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