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방편으로 공부해도 되나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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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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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방편으로 공부해도 되나요?

본문

질문

스님께서는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일 초도 일 년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 초를 일 년만큼의 간절함이나 진실함의 무게를 가지고 놓을 때 아마 그러리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가볍게 그저 놓는다고 그것이 일 년이 된다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그 일 년 못지않은 무게와 힘과 아주 간절함이 있을 때 그러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늘 스님을 뵈면 스님께서 갖고 계신 그 간절함이나 지극함, 이런 것들이 저희들은 안되거든요. 그래서 중생일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순간에 깨닫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저처럼 근기가 낮은 사람이 처음부터 차원이 높은 공부를 단번에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쉽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방편을 찾아서 해 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공부해 나가도 되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그렇게 생각으로 자꾸 신경을 쓰고 그렇게 하면 병이 나요. 나는 여러분이 병나는 거 싫어요. 다 내 몸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우리가 물레방아 돌듯이 얼마나 돌았으며, 물이 흐르듯이 얼마나 울었던가 하는 걸 생각하면 난 아예 그런 건 싫어요. 그러니까 그저 순수하게 그냥그냥, 애쓰지 말고 믿고 놓고 감사하고, 이렇게 그냥 하세요. 신경 쓰고 그러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우니까 말입니다.

이게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처음에는 쪼금 더딘 것 같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방편으로 좌선을 하고 무엇을 하고 이러는 것이 처음에는 쉬운 것 같지만, 뭐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하고 이러니까. 근데 그게 20년이 가도 고만이고 30년이 가도 고만이고,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만날 짓지를 못하고 그것만 들고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에는 아주 소로길인데 나중엔 점점점 들어갈수록 길이 넓어집니다.

방편을 써서 수행하는 것은 처음에는 넓은 길 같은데 갈수록 좁아지다가 나중엔 막다른 골목이 생긴단 말이에요. 화두를 잡는다 또는 좌선을 한다 이러는 것이 길은 처음에는 넓은데 나중엔 점점 좁아지면서 막다른 골목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처음에 넓은 길은 나중에 점점 더 좁혀지고 처음에 좁은 길은 나중에는 점점 넓어진다는 얘깁니다. 왜? 자기가 공했으니까요. 자기를 주인공이라고 해라 하는데 그걸 왜 못 믿습니까? 그게 화두인데요. 자기 생긴 게 화두인데 뭘 화두를 또 잡습니까, 글쎄. 그러니 겉껍데기에다 겉껍데길 또 붙잡으니 그림자를 또 붙잡고 헤매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직통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세요. 생긴 대로 자기가 화두인데 아니, 왜 걱정을 합니까, 글쎄. 애당초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머니 배 밖에 나올 때에 바로 방편으로 가지고 나왔는걸요. 내가 공했으니깐 공에서 나오는 거, 나한테서 모두 나오는 거 아닙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서 나오는 겁니다. 나한테서 나오는 거 나한테다 되놔라 그러는데 뭐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합니까? 나한테서 나오고 들어가고 그러는 거니까, 내가 공했으니까 주인공을 믿어라, 그럼으로써 잠재의식의 근본이 홀연히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바깥에서는 참이 나올 수가 없다 이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도 꿈이자 생시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방편으로 나왔으니까 이것도 꿈이자 생시고 꿈도 생시이자 꿈입니다. 생시에 있었던 모든, 내가 살아나오던 얽히고설킨 상대성 원리가 바로 꿈에도 나타나고 그러는데 꿈에 다른 모습으로 해 가지고 다짜고짜 모르는 인연이 돼서 나와도 바로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자기의 인연줄이니까 모든 거를 자기로 봐라 이겁니다. 그래서 자기로만 본다면 ‘아, 그것도 나지.’ 그러면 통과예요. ‘그것도 나지.’ 그러면 통과입니다. 마구니가 들어와서 칼로 찔러 죽이려고 꿈에 그랬어도 ‘너도 난데.’ 이렇게 생각하면 그냥 없어지는 겁니다. 다 그렇게 없어져서 쫓기지를 않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나로만 봐야지, 하다못해 동물들이 보이더라도 그것도 바로 나입니다. 인간은 미생물에서부터 거쳐 온 걸로만 따진다 해도 하여튼 그런 모습을 다 거쳐서 나왔으니까 그거는 어느 때 연분에 자기가 그 모습을 해 가지고 있었던 그 모습으로 자기한테 보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잠재해서 차곡차곡 쌓여서 있던 것이 자꾸자꾸 풀어지는 거니까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놓게 되면 바로 필름 지워지듯이 그렇게 지워지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둘로 본다면, 절대적으로 자꾸 상대성으로서 그게 엉켜져서 인과응보로서 또 닥쳐온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모든 걸 놔라 이겁니다. 그저 그 자리에다가,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는 그 자리에다 놔야지 다른 자리에다 놓으려고 앨 쓰면 그것이 놔지지 않습니다. 누가 가난을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마음 쓰는 거를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되는 걸 대신 갖다 없애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해 놓은 거 내가 다 없애는 겁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이런 게 있어요. 장님은 지팡이를 짚어야 길을 갈 수가 있듯이 고것이 한 가지 방편이 있습니다. 처음에 정히 지팡이가 없어 허전하면 스승을 붙드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눈 뜬 사람을 붙들고 가다가 눈이 떠지면 그때는 ‘어,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이기에 지팡이도 없는 걸 가지고 그랬구나. 알고 보니 내가 그냥 지팡이구나.’ 이렇게 될 때까지는 붙들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스스로 알아지니까 그냥 ‘아, 스님이 스님이 아니요, 내가 내가 아닙니다.’ 이런 거를 알게 되는 거죠. 어느 사람이든지 다 그럭하라는 건 아닙니다. 즉 말하자면, 정히 어디다가 어떻게 할 수가 없을 때에는 그렇게 하고 어느 정도 나가다 보면 그게 바로 자기라는 걸 알고 그것 또한 내려놓게 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에 바로 나의 마음도 거기 같이 돌아가니까, 그렇게 자기가 알아질 때는 우주 전체가 바로 주인공 한 떡으로다가 화하는 겁니다. 떡 하나 얻어먹으려면 그만큼 모든 거를 한데 종합해서 뭉쳐야 된다 이거예요. 하나로 뭉쳐야지 둘로 된다면 안 돼요. 참선이라는 건 둘로 가는 게 아니라 하나로 뭉쳐서 그 하나마저도 쪼개고 쪼개서, 그 하나도 고정되게 있지 않으니깐 ‘무(無)’다 한 거거든요. 그것이 바로 유전자란 얘깁니다. 그래서 하나로 뭉쳐 놨을 때 고것이 유전자고 고 하나도 세울 게 없다 할 때 무전자로서 이 세상 어느 곳에 아니 닿는 데가 없다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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