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은 어디로부터 생겼는지요?
본문
질문
업이라고 하는 것이, 근본자리와의 관계를 비추어 볼 때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습니까? 그리고 그 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합니까?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지수화풍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죠. 왜냐하면 업이라는 거는 지수화풍으로서의 우리가 돌아가면서 일체 모든 게 전부 공했기 때문이죠.
공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공했다고 했는데 찰나찰나 돌아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공한 거를, 우리가 몸으로만 수행을 하고, 또 일심에 들게 하는 그런 방법이지만 모든 것을 놓았을 때에 일심으로 들어서 일심으로 나게 할 때에 비로소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또 빨라지게 되는 거죠. 또 한 가지는 만약에 그렇지 않고 어느 한 군데로 몰아서 할 때 내 일신은 앉았으면 편안하고 아주 똑바로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수행이 되겠지만 정작 급한 일이 닥치거나 활용을 해야 할 때에는 한 푼어치도 못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막막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거고, 놓지 않으면 얻을 게 없다고 하는 겁니다. 조그만 거 하나라도 놓지 않으면 얻지 못해요. 이 세상에 몽땅 놓았기 때문에 몽땅 얻을 수가 있는 거지 몽땅 놓지 않는데 몽땅 얻을 수가 있나요? 얻는다는 것은 모든 걸 굴릴 수 있다는 점, 놓는 데에 여러 가지가 다 달려 있는 겁니다.
우리는 본래 놓고 가는 거기 때문에,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본래 놓고 가는 거거든요, 지금. 우리가 놓고 가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을 하면 벌써 말한 이전이 돼 버리기 때문에 본래 놓고 가는 겁니다. 한 발짝 떼어 놓았다면 떼어 놓은 것이 벌써 놓고 가는 거기 때문에 이전이 되는 거죠. 내 한 발짝 떼어 놓기 이전이 된다구요. 그래서 주인공은 전체 돌아가는 거를 포함해서 이름하여 이름을 붙인 거고, 업식이라 하는 거는 개별적인 하나의 문제를 사량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게 걸리는 거죠.
그렇지만 놓는다는 거하고 생각을 포기한다는 거하고는 엄연히 다르죠. 그것은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놓는다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거든요. 그런데 할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놓아라, 놓아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놓으라는 소리는 자기가 포기를 하거나 또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욕심에 끄달린다거나 또는 집착에 끄달린다거나 애정에 끄달린다거나 또는 모든 거에 대해서 하여튼, 일상생활에 모든 게 끄달리니까 본래 그냥 놓는다는 언어도 붙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놓아라!’ 이런 소리를 또 하게 된단 말입니다. 하지만 본래 놓고 가는 거란 말이죠, 본래. 사람들이 그걸 놓지 않고 그냥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근데 끊으려고 하면 더 못 끊는 법입니다. 끊는다, 끊는다 하면서 못 끊는 거죠. 왜? 끊는다고 하고 끊으려고 하니깐 못 끊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그대로 그냥 놓고 가는 건데 뭘 끊어라 어쩌라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녹이고 하는 것을 놓아라, 본래 그냥 놓고 가는 거 아니냐, 그러니 놓아라 하는 겁니다. 그대로 놓는다면 그냥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 버리는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유스럽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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