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맡기기만 해도 되는지요.
본문
질문
스님께서는 세 번을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주인공에 믿고 맡기는 것으로 세 번 죽기가 가능합니까? 아니면 스님께서 해 오신 바와 같이 목숨을 떼어 놓고 들어가야 합니까? 주인공을 일심으로 발견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가,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막론해 놓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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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그래서 옛날이라고 할까요, 내일이라고 할까요, 오늘이라고 할까요? 어느 동자가 말입니다, 부처님과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 부처님께서 동자더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자야! 내 발과 네 발의 차이가 어떠하냐?” 하고 물었습니다. 동자의 말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했습니다. “차이가 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고?” 하고 또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동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부처님한테 가면 부처님으로 하나가 되고 부처님이 내게로 오면 나와 하나가 되니 어찌 차이가 난다 하겠습니까?” 했더랍니다. “그러면 그 하나로 돌아가는 것은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또 물었답니다. 이리 가도 하나고 저리 가도 하나라니 말입니다. “그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부처님께서 또 물었답니다. 이 동자는 “박 넝쿨이 담 너머로 넘어가서 박이 열린 까닭입니다.” 했더랍니다. 그러니 부처님 말씀이 또 “그래 박은 여여한가?” 했더니 “박은 제 나무에서 익어서 맛이 좋습니다.” 했더랍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 만공에 꽃이 두루 피고 향기가 두루 나고 만 가지 맛이 나는구나. 그대로 그냥그냥 익었도다.” 했더랍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지금 한 말을 그대로 연결해서 잘 들으셨으면 어떻게 들으시겠습니까? 침착하게 그 과정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경전으로 알려고 하지도 말고 내 마음 가운데서 ‘둘이 아닌 고로 그 하나는 담 너머로 박 넝쿨이 넘어가서 박이 열린다.’ 그 박도 익었어야죠, 또. 그래야 제 맛이 나겠죠?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마음 밖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수없는 억겁으로 진화돼서 나오면서 그래도 선근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인연이 없다면 모이질 않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런 손수건을 하나 들어도 인연입니다. 이 손수건을 내가 들어 주지 않는다면 이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손수건이라는 이름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써 주니깐 바로 이 손수건이라는 빛이 있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인연들도 같이같이 만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한 철 나와서 만나는데 그 만남에 의해서 ‘구덩이에서 빠지느냐 구덩이로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있거든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안으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착하게 마음을 쓰고 선한 일을 많이 하시고 악하게 생각을 갖지 마시고, 항상 부드럽게 한마음 속에, 더불어 같이 내면이나 외부나 모든 것이 직결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한마음 속에 모든 것을 놓으시고, 거기다 맡기시고 어떠한 억울함도, 참으라는 게 아니라 거기다 맡겨 놓고 ‘네놈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시고 물러서지 마십시오. 겉으로도, 말로 부드럽게 하시고 거기다 맡겨 놓으면 자기라는 게 없어집니다.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행동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렇게 무조건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면 아마 조건 없는 사랑이 내 앞에 올 것입니다. 이 미묘한 도리를 여러분이 직접 실험해 보십시오. 실험을 해 보지 않는다면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리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즉 무심과 유심이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동시에 같이 돌아간다는 자체를 아셔야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와 동시에 돌아가죠? 어디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눈과 귀가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어디?
그러니까 동시에 악도 선도 거기 놔라. 악한 거는 ‘선하게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으냐.’ 하고 놓고, 선하게 돌아가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모든 거를 한군데다가 놓는 것이 자기가 공해서 본래 없는 것이기에 따로 없다 이 소립니다. 따로 내가 없는데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거는 잘못돼 돌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독불장군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죠. 그러니까 그것을 완벽하게 알 때까지는 모든 것을 ‘내가 따로 없으니까’ 하고 거기다 놔라 이겁니다. 그게 죽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내가 따로 없는 반면에 모두가 하나로 돌아갑니다, 모두가. 안 그렇습니까? 공생이며 또는 공체며 공용이며 공식화하고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 도리를 완전히 알게끔 하려면 겉으로, 이론적으로, 학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으로서 ‘한마음 속에서 모든 게 들이고 내는 그 무쌍한 만법이, 그대로 더불어 돌아가는구나.’ 하는 거를, 둘이 아니게 말입니다. 그거를 진심으로 자기 속으로 확철히 알려면 거기다가 또 놓고 돌아가야 하니까, 또 두 번째도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말라’ 이 소리가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세 번째도 같이 돌아가면서 서로가 인연에 따라서 손수건을 쥐었으면 손수건을 들고만 있는 게 아니라 땀을 닦는 겁니다. 어디를 씻든지. 그러면 나와 수건과 인연이 마주쳤기 때문에 씻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건 발전의 작용입니다. 발전의 작용! 그렇기 때문에 나툰다고 하는 겁니다. 나툰다. 예를 들어서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땀이 나면 손수건을 들고, 말소리를 내려면 마이크를 들고. 일체 만 가지 만물이 다 나 아님이 없이 나투면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거를 알려면 또 놓고 가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구경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이거죠.
그러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전체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도 모를 거고,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그 원리가 바로 공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그거를 알기 위해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한다 이런 말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동자가 얘기를 했는데 부처님 발과 그 어린 동자의 발과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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