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믿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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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는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문외한인데 제가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기로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써 자기 자신을 깨닫는 종교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스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주인공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깨닫는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주인공을 믿는 것과는 같은 것인지, 아니면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걸 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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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에게 씨가 있는데 그 싹을 틔우지 못했다면 그 싹을 틔우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씨는 본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현실의 내 마음이 과거의 마음과 동일해 가지고 내가 알아야 되니까 그 싹을 틔우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싹을 틔우기 위해서 생사윤회가 둘이 아니다, 크고 작은 게 둘이 아니다, 찰나 생활이 공해서 돌아가고 있는, 공한 주인공을 그대로 배우는 한마음이요, 한마음은 내려놓는 게 한마음이요, 어떤 걸 이름해서 나라고 할 수 없기에 공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공이라고 한 것이니까 우리가 깨달으려면 촉촉하게 물도 줘야 하고 흙도 골라 줘야 거기서 씨가 싹이 틔지 않겠습니까? 마른 땅에서 마른 씨가 어떻게 싹을 틔우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누구나가 그런 과정이 없이는 깨달을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받아 가지고도 ‘이 뭣고’ 하고선 그냥, 자기가 지금 움죽거리고 돌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지식과 학식이 충분히 들어갔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이게 뭣고 하고 10년을 있어 봐도 그것은 싹이 트이지 않습니다. 해결이 돼야 하는데 해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싹을 틔우려면 그대로 물을 주고 흙을 골라 주고 그러면서 지켜보는 겁니다. 그래서 싹이 트이면 그때부터 인제 기르는 거죠. 그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깨닫는다 또는 주인공에다 맡겨 놓는다는 언어마저도 붙어서는 아니 됩니다. 깨달아야 되겠다 이런 것도 놔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어떠한 쇠든 어떠한 쇠 부스러기든 다 용광로에 집어넣는 작업만 한다면, 그냥 그 작업만 하면 돼요. 뒤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 작업만 하면 자동적으로 쇠가 다시 생산이 돼서 나가니까요. 그 쇠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을 할 테니까요.
수박을 갖다 놓고 말입니다, 수박 거죽은 파랗고 그 다음 속은 하얗고 가운데는 빨갛고 씨가 있고, 이런 이론을 벌여 놓고 이론을 배우시겠습니까, 수박을 탁 잘라서 그냥 그 맛을 보시겠습니까? 어떤 거든지 오는 대로, 내 앞에 오는 것대로 용도에 따라서 그냥 잘라서 먹는 겁니다. 그럼 맛을 벌써 알죠. ‘이건 맛이 있구나. 이건 익었구나.’ 맛을 알면 그 씨는 내년 걱정은 하등 할 게 없죠, 씨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도, 내 속에 수박씨를 놔두고도 바깥에서 수박을 찾겠느냐는 겁니다.
수박씨는 바로 각자 나한테 있는 겁니다. 수박이 익으려면 싹이 있어야지 싹까지 끊어 버린다면 수박이 익겠습니까? 과정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우선적으로 내 몸과 마음과 가정, 이 모두를 해 나가는 데만 한번 해 보세요. 그러다 보면 나중엔 우주의 탐험도 할 수 있으니까요. 우선 자기 자신을 믿고 하나하나 실험을 좀 해 보신다면 알게 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