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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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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것에 대해서

본문

질문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것은 정말 아닌데, 이것은 이렇게 되어져야만 하는데….’ 하는 것들이 보이고 들립니다. 누가 봐도 이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그것이 바꿔지지 않고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지요. 불합리한 것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이 세상 자체가 본시 불완전한 것이기에 모른 체해야만 하는 것인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말을 들어서만 꼭 아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안 듣고도 아셔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팔만대장경에 어떻게 이 세상 이치를 다 적으리까. 여러분이 살고 계시는 이 세상을 볼 때에,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뭐냐? ‘너희는 마음에 따라서, 마음이 넓으면 넓은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차원에 따라서, 악행을 하든 선행을 하든 너희 마음대로 가지고 살다가 다 놓고, 네 몸뚱이까지도 놓고 가거라.’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몽땅 다 놓고 가되, 너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인과가 되고 유전이 되느니라. 그러니까 극히 조심하고 인생에서 선덕을 잘 쌓고, 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제일 으뜸가는 공부니라 하신 겁니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개미 하나, 풀 한 포기도 전부 여러분의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허공은 허공대로 ‘자유스럽게, 티 하나 걸리지 않고 흘러 돌아라.’ 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 나같이 살라’ 하는 겁니다. 물은 물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생명들이 살아나가는 집으로서 만생을 이끌고 나가는 물은 더럽다 깨끗하다는 말 없이, 어떠한 차원도 없이 흘러갑니다. 그것도 바로 스승입니다. 우리들이 배워야 할 스승!

그뿐이 아니라 동쪽으로 바람이 불면 동쪽으로, 서쪽으로 바람이 불면 서쪽으로, 나무들도 바람 부는 대로 바람에 날려서 아무리 뿌리가 뽑힌다 하더라도 말없이 그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원통하다고 원망을 하거나 바람이 왜 부느냐, 왜 뿌리가 뽑히게 하느냐, 왜 못살게 하느냐, 왜 눈이 오느냐, 왜 우박이 오느냐, 그래서 왜 나한테 타격을 주느냐, 이런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유냐.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는 겁니다. ‘우리처럼 말없이 살라’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뿐입니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어 씨를 만들어 놓고는 겨울에는 그냥 앙당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뽑히고 뿌리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역시 뿌리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모든 게 스승 아닌 게 어디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개미들이나 짐승들을 보십시오. 날아다니는 새들도 알을 까 놓고 자기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그거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식들을 낳고 지키고 이끌어 주고 똑바로 가게 하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누가 어떻게 해칠까 봐 걱정이고 말입니다. 어떻게 살림살이가 다르겠습니까. 모습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지마는 그 살림살이의 근본은 다 똑같은 겁니다. 개미들도 그렇고 말입니다. 얕잡아 볼 게 하나도 없죠. 그래서 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만생이 다 이렇게 나와 같이 공생(共生)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화(共食化) 하고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다 자식이다 이런 데 연연하고 애착을 갖고 붙들고 늘어지는데,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항상 말하지마는 억겁 광년을 거쳐서 이렇게 오는 동안에 도둑질은 안 했겠습니까. 생명을 잡아먹지는 않았겠습니까. 나쁜 짓은 안 했겠습니까. 모자라지는 않았겠습니까. 병신은 안 됐겠습니까. 이렇게 가지각색으로 거치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자라는 사람을 보면 과거의 모자랄 때 내 모습으로 보고, 잘못한 사람이 있을 때는 바로 과거의 잘못한 내 모습으로 보라는 거죠. 그러면 속에서 악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기가 없어지고 유하게 부드럽게 말이 나갑니다. 그래서 둘 아니게 보라는 거죠.

부모 자식이다 할지라도 한 철 부모 자식이지 그 한 철이 지나면 그대로 뿔뿔이 몸도 다 놓고 갑니다, 제가끔. 원점으로 돌아가죠. 거기서 또 생(生)해서, 재생이 돼서 다시 나올 때에는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과(果)를 가지고서 이 세상에 또 출현을 하게 돼 있죠. 그러면 또 딴 부모의 자식이 되죠. 이건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렇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넓게 생각을 할 때 내 부모 아닌 게 어디 있고 내 자식 아닌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한 찰나에 인생이 가고, 한 찰나에 인생이 생하고 이렇게 돌아가는데 어떻게 요 한 철만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친구들이 모여서 놀러 갔다고 합시다. 모여서 놀러 갈 때는 한 식구입니다. 그리고 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즐겁게 놀다가 저녁이 되면 다 헤어집니다. 다 뿔뿔이 자기 갈 데로 다 헤어지고 그 자리조차도 내놓습니다. 그와 같은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만 그런 게 아니라 우주의 섭류도 다 그렇단 말입니다. 저 혹성이나 핼리혜성이나 또는 어떠한 별성이든 수명이 길고 짧을 뿐이지 섭류는 한 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아래로 쭉 내려다보세요. 짐승들이나 새들이나 토끼들이나 뭐, 이러한 것들은 수명이 인간보다 짧고 그렇지만, 수명이 아주 긴 것도 있고, 수명이 아주 짧은 것도 있고 천차만별로 길고 짧고 길고 짧게 돼 있습니다. 인간은 열 달이 돼야 나오지만 6개월 만에 낳는 것도 있고 석 달 만에 낳는 것도 있고 몇 주일 만에 낳는 것도 있고, 그거는 여러 층으로 아주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그렇게 차원에 따라서 자기한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술자라면 기술자끼리 모이고, 농사꾼은 농사꾼끼리 모이고, 배를 타는 사람은 배를 타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이렇게 끼리끼리들 모여서 살듯이 말입니다.

그런 모든 현상 속에서 우리를 끌고 다니기도 하고 다 놓아 버리게도 하는 그런 장본인인 주인공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 않으며, 어떻게 무시하겠습니까. 수억겁 전부터 생기게 해서 이렇게 인간까지 이끌어 왔는데 말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허공을 믿을 수도 없는 거고, 이름을 믿을 수도 없는 거고, 형상을 믿을 수도 없는 거고, 스님들의 고깃덩어리인 몸뚱이를 믿을 수도 없는 겁니다.

“부처님 법이 어떠한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주먹을 불끈 쥐고선 쑥 내밀었단 말입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내 중심입니다, 중심! 팔뚝! 중심! 오온(五蘊)을 다 쥔 겁니다. 이 쥐었다 하는 것은, 일체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전부 같이 돌아간다는 겁니다. 인간의 마음만 같이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태양이니 별성이니 달이니, 어느 혹성을 막론하고 같이 돌아갑니다.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근본에 직결돼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가 내 살림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이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며 서로 주고 서로 살리기 때문에, 이 세상사가 전부 가설이 돼 있는 근본은 바로 내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 먼저 알아야 된다. 나 먼저 발견해야 된다. 나 먼저 믿어야 된다. 나는 나를 끌고 다니는 나를 믿어야 된다 이러는 겁니다. 그거를 믿지 않고 누구를 믿습니까. 아무것도 몰라도 “넌 누구를 믿느냐?” 하면 “내 주먹을 믿어!”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보십시오! 초를 켰는데 한쪽이 기울어지게 타 들어간다면 촛농이 흐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거를 가위로다 딱 잘라서 똑바로 해 놓고, 기울어지는 것을 똑바로 세워 놓으면 한쪽이 이그러지지 않으니까 촛농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의 마음도 마음으로써 다스리면서 나가는 것이 바로 그런 거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소고삐를 자기가 쥐고, 남의 파 밭으로 들어가면 “파 밭으로 들어가선 안 돼. 이랴!” 하고, 딴 데로 가면 “워 워!” 해서 항상 똑바로 가게끔 고삐를 쥐어라 이 소리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안 하고 그냥 갈 수 없는 바로 자기 공부입니다.

항상 방편으로 말씀드리지만, 내 집에 전화를 먼저 놔야 남한테 전화도 받고 전화를 할 수도 있는 거지 내 집에 전화를 놓지 않고서는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전화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과 법칙이라든가 또는 유전 법칙이라든가 이 모든 생태의 문제들을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나를 알면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에 유유하고 아주 자연스럽고, 자동적으로 정신계와 물질계를 작용하면서 베풀어 나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냥 말로만 알고 머리로만 굴려서, 이론으로만 쫙 알아 가지고 말을 아무리 잘해도 실천에 옮겨지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터득하면서 체험하면서 나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앉았다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섰다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뭣고?’ 하기 이전에 ‘만법을 들이고 내는 그것이 하나로 돌아가는구나.’ 해서 그것을 능가할 수 있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로 돌아가니까 ‘그놈이 뭣고.’ 하기 이전에 아, 그놈이 하는 거니까 모든 걸 거기다가 되돌려 놔라 이 소립니다. 의심할 게 뭐 있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들이고 내고, 나쁜 거든 좋은 거든 못났든 잘났든 내가 가는 길인데 의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말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바깥으로 생각을 지어나가지 말고, 한 발짝을 떼어 놔도 실천을 할 수 있는 내 심력을 기르는 것만이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나가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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