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위해 어떻게 놓고 관해야 하는지?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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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위해 어떻게 놓고 관해야 하는지?

본문

질문

스님께 삼 배 드리옵니다. 저는 마음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초심자입니다. 제게는 31개월 된 예쁜 아들이 있는데요, 성장 발달이 많이 느립니다. 그래서 많이 걱정되고 안타깝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당장 죽는다 해도 주인공이 있기에 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님, 정말 자식 일은 왜 이리도 놓기가 힘이 드는지요? 열심히 공부하다가도 자식 일에 부딪치면 꽉 막힙니다. 그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인공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한바탕 우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스님, 이 못난 어미가 자식을 위해 어떻게 관하고 놓아야 되는지요. 이 어리석은 중생을 위하여 스님의 마음 한번 내 주시길 간절히 원하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여러분이 얼마나 그대로 진행하면서 실천을 하면서 체험하면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지 이 자체를 가만히, 자기를 좀 보세요. 내가 욕심이 있는가 없는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자기를 검증해 보세요. 내 자식이 금방 차에 치여 죽는다 하더라도 내가 눈 하나 꿈쩍 안 하겠는가. 한번 그거를 생각해 보세요. 자식을 가지고 너무나들 애착하기 때문에, 이걸로 한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식이 금방 차에 치여 죽었다 이런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가슴에다가 넣고 지지고 볶겠습니까, 가슴에다 묻어 두겠습니까, 그 영혼을 그냥 승천시키겠습니까?

자식이란 인연이 있어서 만난 거예요. 그런데 자식의 인연이 우리가 전자에 어떠한 과정을 살아나갈 때 악으로 맺어진 인연이라면 악으로 나와요. 예를 들어 부모에게 아주 극진히 잘하고 있다가 탁 없어져 가지고 부모에게 뼈아픈 고통을 주듯이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도 자식이 아니에요. 매미가 자기 몸 하나 꺼내려고 자기 몸을 그냥 막 갈갈이 찢죠. 자기 몸을 찢어서 자기를 꺼냅니다. 자기를 꺼내서 나와도 자기입니다. 그럼, 자식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건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면 나한테 넣어도 그저 착이 없고 항상 같이 하면서 같이 살죠. 그렇게 돼서 우리가 회향을 할 때는 그냥 일체 만물만생이 다 한마음으로 흡수가 돼서 회향을 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보살행이죠. 그렇게 모두 둘이 아니게 보고 둘이 아니게 행해야 하고 둘이 아니게 아픔을 거두어 줘야 하고, 자기 몸이니까. 둘 아니게 이끌어 가야만 그 지위가 그대로 보살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또. 잘못 알아듣지 마세요. 사랑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할 것 다 하시되 착을 두지 말라 이런 거죠. 부모한테도 그렇고 자식한테도 그렇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착을 두고 기복으로 자꾸 바깥으로 끄달리면, 예를 들어서 어떻게 걸리다 보면 소도 되고 말도 되고 그런단 말입니다. 회향할 때 그렇게 돼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중세계라는 것은 잘못하면 짐승으로 갔다가 또 잘하면 사람으로 오고, 이렇게 뒤범벅이 되는 굴레바퀴 같아요. 수레바퀴 같단 얘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잘하는 거냐. 오직 자기 주장자, 자기 주인공에서만 생활을 그냥 하세요. 주장자에 의해서만 생활을 하세요.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니니까요. 주장자의 시자니까요. 심부름꾼이란 얘기예요. 자기 주장자의 심부름꾼이에요. 자불의 시자죠. 입산한 사람들은 자불의 시자라고 할 수 있고 여러분한테는 자불의 심부름꾼이라고 할 수 있죠.

그전에도 만날 말했죠. 부처님께서는 방편으로 몸뚱이를 배로 비유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몸뚱이가 배라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들은 중생이라고 비유했어요. 그리고 내 주인공을 선장으로 비유를 했고요. 그럼 선장이 이끌어 가는데 가만히 거기다 맡기고 있어야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배가 뒤집히지 않고 가는 데까지 가죠. 그런데 이거는 바람이 불면 바람 분다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뭐, 별거 다 찾죠. 이렇게 하면서 서서 날뛰고 난동을 부리니까 배가 뒤집히지 않고 견딜 수가 있나요? 그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선장한테 맡기고 배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배도 뒤집히지 않고 저절로 그냥 잘 가고 또 선장과 둘이 아니게 되고, 얼마나 좋으냐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파도가 일고 생활할 때 어떠한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는 원력이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원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원력이 없으면 그렇게 안되죠. 원력이란 건 뭐냐? 믿음이에요. 믿음이 깊어지면 어떠한 것도 무섭지 않단 말입니다.

이 도리는 모르지만 믿음이 진실한 어떤 분이 있었어요. 연세가 좀 많은 보살이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죠. 그런데 이 도리는 하나도 몰라요. 그러나 믿음은 있어요. 그분은 오직 믿음으로써 사는 분이에요. 그런데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노인은 눈 하나도 깜짝거리지 않아요. 다 죽는다 하더라도 ‘죽게 되는 거니까 죽는 거지.’ 그냥 이래요. 믿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데 오히려 자식들이 잘되고 몇십 년씩 앓다가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서 죽게 된 남편도 그냥 쓱쓱 털고 일어나게 됐죠. 그러니까 그 믿음이 원력이에요. 믿음이 얼마나 강했으면 모두 그냥 그렇게들 일어납니까. 벌써 보면 알잖아요. 가정을 보고 그 사람 살아나가는 걸 보면 벌써 ‘어, 저 사람은 원력이 벌써 어떤 단계에 갔구나.’ 하는 걸 알게 돼요.

어떤 회사를 크게 해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고 그냥 턱턱턱턱 해내고 가는 것도 믿음이거든요. IMF 세상이 돼서 이렇게 살기가 어렵다고 그러지만 잘하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가르쳐 준 은혜를 어떡하면 다 갚을 수 있겠느냐는 거죠. 머리를 깎아서 신을 삼아 드려도 다 못 갚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랬어요. “나한테 갚으려고 하는 생각도 버려라. 바로 네가 나고 내가 너라면 그대로 네가 하는 건데 뭘 어디다 갚고 어디다가 주고 하느냐. 어디다 갚을 게 있느냐. 그러니 너와 모습이 둘이 아니요, 생명이 둘이 아니요, 바로 마음이 둘이 아니요, 어려움이 둘이 아니요, 아픔이 둘이 아니니 둘이 아닌 그 사람이 어려워하걸랑 좀 나누어 주면서 살아라. 그게 갚는 거다. 일부러 내가 모르는 사람을 쫓아다니려고 애를 쓰지 말고 내 앞에 그런 사람이 보이거든 서로가 서로를 도와 가면서 사는 게 바로 그 빚 갚는 거다.” 그러니 공부는 더더욱 증장이 되고 공덕도 더더욱 증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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