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시련에 숨이 막혀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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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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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시련에 숨이 막혀요

본문

질문

끊임없는 숙제가 물밀듯 밀려듭니다.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공부의 재료로 삼아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고는 있지만 순간순간 속아 넘어가는 저 자신을 보면서 정말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다가오는 시련에 숨이 막혀 옵니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도리를 배워서 알기에,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내가 피해서 도망갈 데도 본시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한발 한발 떼어 놓고 있습니다. 경계에 속지 않고 마음의 길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항상 그런 말씀을 드렸지마는, 여러분이 등에 잔뜩 무거운 걸 짊어지고 급해서 제게 오시면요, 급해서 죽겠는데 무슨 공부냐 이럽니다. 웬 말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짊어지고 지금 안고 갑니다. 그런데 이 짊어진 것부터 내려놔야 숨이 막히도록 다가오는 그것이 다 녹아버린다 이겁니다. 주인공이라는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서 공부부터 해야 하니깐, 자꾸 그 자리를 쥐고 나가면 봄이 와서 스스로 눈이 녹고 얼음이 녹듯이 슬슬 녹아버려서 그냥 줄줄줄 눈물이 비오듯 하면서 자기 자성(自性)의 발로(發露)가, 그때부터 싹이 나오기 시작을 하는 겁니다. 지금 현상이 급해서 안고 가는 모든 것이 스스로 물러나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고 그저 앞에 닥치는 것만 급해서 야단들을 하시는데 뒤의 것부터, 짊어지고 나온 것부터 녹이면서 가다 보면 뒤에 짊어진 것이 무쪽같이 뭉청뭉청 떨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냥 차츰차츰 떨어지는 사람이 있고, 한꺼번에 몰락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고난이 있는 것이 공부할 수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고난 있는 걸 ‘아이구, 감사해라.’ 이렇게 나올 겁니다. 감사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때가 있습니다. “주인공 붙들고 나가니까 너무나 잘되고 좋습니다.” 하다가 “아이구, 요새는 아주 캄캄하고 막혀서 영 안됩니다.” 이럽니다. 그런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되다가 안되는 그 자체가 바로 공부입니다. 잘되기만 하면 그건 공부가 늘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안되는 것도 법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안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할 양으로 노력을 하고, 안되는 것도 법인 줄 알아야 ‘아, 안되는 것도 여기서 나를 다져서 공부시키느라고 이러는구나!’ 하고 감사하게 생각을 할 때에 그건 없어집니다.

그러한 단계가 없으면서도 있듯이, 여러분이 어떤 회의를 느끼지 마시고 그저 훌떡훌떡 넘어가야 됩니다. 이렇게 빠른 세상에 지금 심령학을 하는 사람도 물질로만 나가고 또는 소소한 무슨 잠재의식 가지고 이러고 그러는데, 잠재의식이라는 것은 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우리가 한 것대로 각본대로 감겨 있는 겁니다. 감겨 있는 걸 지금 우리는 송두리째 그냥 녹이는 겁니다. 요리를 해서 우리가 맛을 보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러니까 요리를 해서 맛을 볼 때에 우리가 ‘주인공’ 하면 벌써 전체를, 이걸 이렇게 말을 할까요? 그릇을 말입니다, 그릇을 시장에 가서 사 왔는데 크고 작은 게 같이 들어 있는 한 세트를 사 왔습니다. 그 한 세트의 그릇은 우주 삼라만상의 전체 세트라고 봅시다. 그런데 이게 크고 작고 아주 조르라니 한 세트거든요. 그러면 내가 용도대로, 즉 말하자면 많은 걸 담으려면 큰 그릇을 꺼내야 하고, 적은 걸 담으려면 조그마한 그릇을 꺼내야 하고 그러죠.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 하면 한 세트이며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빼 쓰는 거는 각자 용도대로 빼 쓰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그래서 한 손에 쥐고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씀씀이에 의해서 용도대로 써라 하는 것은 용(用)만 있는 게 아니라, 모두 근본의 축으로 인해서 돌아가는 그 자체를 쥐고서 하나하나 나투면서, 자기가 큰 거든 작은 거든 즉, 우주의 섭리든 몸의 섭리든, 몸의 병고든지 업보든지, 죽어서 좋은 데로 갈 거를 생각하든지 이런 거 저런 것들을 다 놔버린 상태에서 그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걸 자기가 얼마나 더 잘 압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되는 겁니다. 그대로 스스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이구, 이건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 저건 저렇게 하면 안되는데….’ 하면서 안되는 게 너무 많고 되는 게 너무 많아서 안되는 겁니다, 정말. 되는 것 안되는 걸 다 놓은 사이가 아까 한 세트라는 얘깁니다. 되는 것도 놓고 안되는 것도 놔라 하는 거는 그 되는 것 안되는 것, 죽는 것 사는 것을 거기다 한데 합쳐서 내가 한 세트로 묶어서 모든 것을 근기 있게 축으로 가졌을 때, 그것은 자기 용도대로 다 꺼내서,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빼서 쓸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그걸 갖지 않고는, 그걸 계발 안 하고는, 용(用)의 숙달이 되지 않고는 도무지 안되는 겁니다.

바람이 불어와도 그것도 생명이 있는 겁니다. 바람도 생명이 있어요. 눈도 있고 코도 있고, 혀도 있고 다 있단 말입니다. 날름 집어먹을 수도 있어요. 사람도 그냥 날름 집어먹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 무서운 생명들이에요. 그런데 그 생명이 나와 둘이 아니라면, 그 모습과 내 모습이 둘이 아니라면, 그 용(用) 쓰는 거와 나와 둘이 아니라면, 그게 바로 나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 집어먹을 수가 없어요, 절대로 그거는. 또 그뿐입니까? 어떤 혹성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몰라서 그렇지 병고가 전 세계로 퍼지는 것도 그렇고 한쪽에만 퍼지는 것도 그렇고, 모두가 모습 없는 모습들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을 이끌고 가실 수 없다면 가정을 어떻게 끌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사회를 끌고 가며, 국가를 끌고 가며, 통일을 바라보며, 어떻게 세계를 조절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를 조절 못한다면 우주를 어떻게 조절하겠습니까? 이 한 점에, 한 점도 내놓을 수 없는 한 점 이 마음에 달렸다는 거를 여러분이 잘 아셔야 됩니다. 너무도 고차원적이라고 하지만 고차원적도 아니고 고차원적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거는 인간의 섭리가 그대로 될 수 있게끔 돼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금(金)이 돼도, 빛을 내서 금빛으로 하여금 수천수만 개로 남들한테 전부 배부돼야 되고 전부 내가 돼야 되는데, 금으로 나와 가지고도 산에서 금방 캐 놓은 금이란 말입니다. 이 도리를 모르면 그거는 빛이 안 났기 때문에 이자도 붙지 않고, 금이 더 늘지도 않고, 빛도 안 나고, 광도 나질 않아서 그냥그냥 그대로 왔다가 그대로 가는 이치밖에 되질 않아요. 요다음에 또다시 태어난대도 좌천될지 올라갈지 덜할지 더할지 그것도 모르면서 우리는 쓰러져 가야 되는 이런 입장입니다.

우리는 그대로 여여할 수 있고 묘법을 그대로 갖고 부처 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생각에 달렸다는 얘깁니다. 한생각에 뛰어넘을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살아오던 습을 녹이기 위해서, 녹이기 위해서 나오는 자리에다 되놔라 이런 소립니다. 여러분이 각본대로 나오는, 팔자 운명대로 나오는, 죄업대로 나오는, 유전성대로 나오는 거기에다가 되놓을 때엔 말 못하는 사람, 귀로 못 듣는 사람, 뭐 별 사람 다 있지마는 서서히 풀려 돌아가죠. 여러분이 그렇게 진심으로써 할 때에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하는 그 결정체의 참뜻을 우리 스스로가 실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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