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빠른 방법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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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많은 분들이 한마음 공부를 하니까 자기의 어려운 일들이 잘 해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공부하는 방법이 공 도리를 바로 가르치는 방법보다 늦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공부하는 방법이, 조사들이 가르치신 절대 공의 자리를 모르는 입장에서 활용에만 빠지는 게 아니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나는 어려서부터 이날까지 쉬지 않고 걸어오면서 뼈가 굵어졌습니다. 이 뼈 자체도 없는 거지만 말입니다. 그랬는데, 별짓 다 하면서 가르쳐 왔지만 도저히 안되는 것이 ‘관세음보살’ 하고 바깥으로만 찾고들 그러는데, 가만히 보면 자기 가슴에는 하나도 불을 안 켜고 바깥에다 불을 켜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가정이 윤택해지고 자기 중생을 제도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다 부처입니다. 근데 자기 중생을 자기가 거들지 못할 땐 남도 거들지 못하고 해롭게만 됩니다. 아, 자기 몸뚱이 하나 해롭지 않게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몸뚱이를 해롭지 않게 하겠습니까.
말로만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실천을 옮길 수 있어야만 되는 거죠. 이건 생활과 불교가 분리돼서 있는 게 아닙니다.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직결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 따로, 부처님 앞에 가서 불공 들이는 거 따로, 생활 따로, 그러니 이거 어떡합니까? 이게 불교를 제대로 가르친 게 아닙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네 마음을 증득하고 네 마음을 발견해라!’ 이런 거지 찾으라고도 안 그랬습니다. 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찾기는 뭘 찾습니까! 발견해라 한 거지. 그렇기 때문에 불교인들한텐 주인공을 주장했고, 또 딴 사람들한테는 심주(心柱)라고도 설명했습니다. 지금 그렇게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진실된 마음으로 ‘이 너가 바로 심주다.’ 이렇게 집어 주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또, 받는 그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진실로 받아들이느냐, 진실로 줬느냐 이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우리 불성은 유생 무생의 불성이 다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항상 빼고, 극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항상 빼고 합니다, 모두. 예를 들어서 ‘죄 몰락 놔 버려라!’ 하니까, 그 말을 듣고선 “다 몰락 놔 버리면, 그냥 놔 버리면 어떡합니까?” “그냥 놔 버리지 그럼 돈 내고 놔 버리시겠소?” 이럽니다.
공(空)에서 와서 공에서 사라져요. 근데 왜 공이라고 했느냐. 우리 모두가 살아 있고 움죽거리기 때문에 공이라고 한 겁니다. 이 공을 유로 살리기 위해서, 즉 말하자면 유에 나타나는 이 자체를 지금 기독교에서는 창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나툼으로 끝났습니다. 나툰다! 이것은 엄연히 살아서 나투면서 돌아가고 있다.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나투면서 지금 돌아가고 있는데 왜 공이라고 했겠느냐?
먼 데를 보지 말고 가까운 데를 보세요. 우리가 하루 24시간 동안에 고정관념 속에서 고정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을 만날 때에 고정된 생각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만나면 이런 생각이 나고 저 사람을 만나면 저런 생각이 나고, 그렇게 그 사람에 맞춰서 말을 해 주고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금을 수억을 가졌고 회사를 수십 개를 가졌다 할지라도, 또 대통령을 한다 하더라도 그게 오히려 ‘고를 만들어 놓고 고를 받는구나.’ 하는 거를 아마 실감할 겁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방 한 칸 있으면 있는 대로 그거만큼, 두 칸 있으면 두 칸 있는 대로, 회사가 열 개라면 열 개 있는 대로 그 고는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도리를 안다면 열 개를 가졌어도 함이 없이 할 것이고, 방 하나를 가졌어도 함이 없이, 가졌음이 없이 가졌고, 함이 없이 생활을 하니까 그것은 관리인밖에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렇게 나갈 수만 있다면 참 보람 있게, 인생살이를 아마 멋있게 살 겁니다.
내 거, 내 회사, 내 재산, 내 사람, 내 사랑, 웬 게 그렇게 내 게 많은지 전부가 내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끄달리고 얼마나 복장을 치고 얼마나 애통하고 살맛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살아 봤던들 몇 해나 살까요? 철들기 이전 빼고 철들고 나서 몇 해, 몇 해가 지나고 나면 껍데기가 인제 늙어지게 되니, 젊어서 몇 해 동안이나 기분 좋게 내 거라고 그러고 살까요? 난 한심스럽습니다. 모두 사는 게 말입니다.
한 발짝 두 발짝 시계추가 가는 것처럼 자기는 가는 줄 모르게 지금 가고 있습니다. 가고 있는 대로 그것은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오고 있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 도리를 모르면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한 채, 그 윤회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점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도리를 모른다면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너무나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도리를 알면, 허무 아닌 것도 아니요 허무한 것도 아닌 그 실상의 그 지혜는 이 우주를 덮고도 우주의 모든 것이 내가 아님이 하나도 없이 그렇게, 자유스런 그런 마음으로써 아마도 평화스러울 것입니다. 남들처럼 잘 먹는 것보다 우거지에다가 보리밥 한 술을 먹는다 하더라도 아주 참 웃음이 날 수 있는, 그렇게 좋아서 웃음이 날 수 있는 그 웃음은 누구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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