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진짜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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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스님, 저는 어린이 법회에 다니면서 동생과 싸움도 하지 않고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저를 한번 돌아봐도 선원에 가서 절을 할 때 그냥 할 때도 있지만 마음에서 한두 가지는 꼭 마음을 내거든요.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저의 친구들도 다들 한두 가지씩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절을 하는데 정말 부처님께서는 진짜 계셔서 그것들을 다 듣고 다 이루어 주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냥 앉아서 절만 받으시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스님, 저의 궁금증을 꼭 풀어 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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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 에너지가 불(佛)이고 불성은 바로 에너지야. 에너지 주장자. 그래서 밤이면 에너지를 조성하고 낮이면 그 조성한 에너지가 쓰이고 이러지. 이게 현실이거든. 우리 어린이가 어려서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모습들을 가지고 살면 얼마나 살겠니? 생각해 봐라. 그런데 단 일 분이라도 어디 앉아서 참 즐겁게 한번 한 발을 떼 놔 봤니? 한 발을 참, 감이 없이, 떼 놓은 사이 없이 떼 놓을 수 있어야만 극락이거든. 그런데 극락이라고 좋다고 할 게 없다 하는 걸 말하고 싶어, 또.
전자에는 부처님 하면 다 그냥 저렇게 앉아 계시는데 참 부처님이 장하시구나! 부처님은 참 좋았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야. 너무도, 어린애들 기를 때 밑 씻어 주고 코 씻어 주고 하면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심부름하는 어른과 같아. 그런데 부처님이 저렇게 앉아 계시기만 하니까 그냥 우습게 생각이 되지. 근데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단다.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대략 다 알겠지만, 밤이면 저런 데로 돌아서 이렇게 사람의 기척이 있으면 다시 올라가고 이래도 사람들은 모른다 이거야.
다 깨치면 어떻게 사시나, 다시 재생을 해서 또 나오시나 이러는데, 보니까 재생을 해서 나오시는 게 아니에요. 그냥 찰나찰나 화해서 여러분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나타나시고는 또 화하지. 상대방은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냥 누군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일으키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모습이 되지. 그러면 상대방이 모르지. 지팡일 짚고 다리를 질질 끌고 가시다가 어떤 사람이 쓰러져서 있으니까 “아이, 일어나!” 그러면서 다리를 이렇게 이렇게 치니까 그냥 일어났어. “다리 인제 안 아픈가?” 하니까 “안 아픕니다.” “그럼 어서 가. 여기서 이렇게 쓰러져 있으면 얼어 죽어. 얼어 죽진 않아야 공부를 하지.” 그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돌아서니까 없어졌더라 이거예요.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방 없어졌느냐는 얘기죠. 그건 화하니까 그렇죠.
그리고 우리 어린이뿐만 아니라 신도님들을 위해서 요거 한마디만 더 하죠. 옛날에 산에서 비구 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계셨는데 동짓날이 돼서 팥죽을 쑤게 됐어요. 팥죽을 쑤려고 하니까 불씨가 꺼졌더랍니다. 옛날엔 불씨를 꺼트리지 않아야지 불씨만 꺼트렸다 하면 공사가 벌어지고 야단나죠. 근데 그 불씨를 꺼트려 버렸다 이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눈이 그날 산더미처럼 와서 스님네들이 영 불씨를 얻으러 갈 수도 없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어서 집 안에 들어와서 그냥 굶고들 있는데 나한 방에서 말입니다, 나한이 있는 방에서 제일 조그만 동자 나한이 나갔어요. 나가서 불씨를 얻어 온 겁니다. 불씨를 얻으러 가니까 “아 참, 이렇게 눈이 많이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쪼끄만 동자가 왔느냐?” 그러니까 “행자는 스님네가 말씀하시는 대로 항상 그 말씀을 어기지 않고 해야만이 행자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겁니다.” 하고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불씨를 안 줄 수가 없죠. 그래서 “얘, 추운데 팥죽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 하고 자꾸 권하니까 들어가서 안 먹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방편으로 먹어야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걸 먹는데, 방편으로 먹는 건 똥도 안 누죠? 똥을 만들어서 누면 그건 방편도 아니고 나한도 아니죠.
그래 그렇게 해서 불씨를 얻어 가지곤 갔단 말입니다. 가서 아궁이에다가 불을 내 놓고는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부엌에서 불 소리가 나거든요. 그래 스님네들이 나가 보니까 아궁이에서 불이 활활 타거든요. 그래서 그날 밤에 팥죽을 쑤어 가지고는 배고픈 걸 다 면했죠. 옛날에는 팥죽을 쑤다가 그 맑은 물을 떠서 무명 영가들, 즉 말하자면 사람들만 무명 영가가 아니니까, 무명 영가들을 위해서 다들 끼얹어 주고 그랬는데 그 이듬해 봄이 왔어요.
봄이 와서 주지 스님이 저 아래 마을에 내려가니까 뭐라 그러느냐 하면 “아니, 동자를 내려보내서 불씨를 얻어 가시더니 왜 불씨를 안 주십니까?” 하더랍니다. 불씨를 얻어 가면 불씨를 꼭 갚아야 되거든요. 왜 불씨를 안 주시냐고 하니까 주지 스님이 “저희는 그런 예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예가 없다고 하니까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래 주지 스님이 올라와 가지곤 “너희들 불씨 얻으러 간 예가 있느냐, 없느냐?” 하고 모두에게 물었어요. 한 사람도 얻으러 간 예가 없더란 얘기지요. 그래서 조그만 도량이니 이거 안 되겠구나! 그러곤 방마다 다 열어서 조사를 했어요. 근데 나한 방 맨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동자 입술에 팥죽이 묻었더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서 그 주지 스님은 ‘야! 법이 이렇게 중대하고 이렇게 묘하고 이렇게 광대한 것을 우린 몰랐구나!’ 이럭하고선 그 나한의 입술에 붙은 죽을 씻어 주면서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살면서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그러지만 어떠한 일이라도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을 먹기에 달렸다. 마음은 너무 많아서 없는 게 마음입니다. 부처도 없는 게 부처죠. 어떻게 있는 게 부처입니까? 부처가 너무 많아서 없는 게 부처다라고 했습니다. 많아서뿐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오늘 24시간 살아나가시는 데도 함이 없이 하고 있구나. 우린 여태껏 뛰고 있었는데 뛴 사이가 없구나.’ 하는 겁니다. 뛴 사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묘한 도리로써 사십니까? 오늘 일을 하시는데도 그냥 눈이 이거 보고 저거 보고 조거 보고.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신다면 진짜 내면에 공마당을 크게 만들어 놓고 공치기를 하거든요. 공치기 하면 그 공이 서천국에도 도리천에도 어디든지, 동천이든 북쪽 북두칠성 도량이든지 뭐 어디든지 다 왕래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내 내면에서 공을 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 귀찮아서 어떻게 의식을 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길을 가다가 소 눈을 봐도 한 찰나에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런 얘기도 있죠. 어떤 스님이 게을러서 영 일을 안 하다가 소가 됐답니다. 그런데 스님네들이 향나무를 못 얻어서 마루를 못 놓고 있는데 거기에 향나무를 실어다 주고 죽었다고요. 간략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금 재생이 돼 가지고 스님이 됐다고요. 그 입산한 사람이 10년 후에 “아, 내가 어머니 아버지라는 인연을 맺고 다시 안 나와도 될 것을, 다시 안 나오고 자네들을 만나도 될 것을 인연을 맺어서 또 이렇게 서 있는 게 아주 귀찮게 돼 있다.”라고 하더랍니다.
내 모습은 물질계고 모습이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머리에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잘들 좀 생각해서 실천해 보시면 살아나가는 데 아주 유익하고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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