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를 켜고 불을 밝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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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부처님께서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하셨지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2007년 한 해가 또 밝아 왔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즈음에 다른 사찰에서도 그렇지만 선원에서도 촛불재를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신년기도회가 아니고 촛불재인지요? 그리고 특별히 초를 켜고 불을 밝히는 연유가 무엇인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그러면 왜 우리가 정월이면 촛불재를 올리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왜 불이 그렇게 귀중하고 그런가 하는 것을 대충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생명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돼 있었을까. 우리가 바람과 흙과 물과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그 속에서 세 가지가 모두 한데 협조하는 바람에 그 가운데서 불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 불이 생겨서 곳곳마다 불이 일어나고 그러니 모두가 지수화풍으로 둘러싸이게 돼 있었죠. 그래서 스스로 생명체들이 생겨나게 돼 있고요. 가만히 보세요. 지수화풍의 수분과 흙과 바람과, 바람이라면 즉 공기와 모든 게 종합되지 않는다면 생명체가 생길 수가 없어요. 모든 게 한데 종합됐기 때문에 흙을 갖다가 그냥 오래도록 쌓아 놔도 그 흙 속에서 생명체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 것과 같이 생명체들이 그렇게 해서 창조가 됐다고 하는 거죠.
생명체들이 생겨나기만 했으면 또 뭘 합니까? 생겨나 가지고 그 모든 게 조절이 되질 않아서, 크기만 하고 조절을 못하니 차원의 질서가 잡히지 않고 이렇게 되니까 뒤죽박죽이 되고, 먹히는 놈도 그렇고 잡아먹는 놈도 그렇고, 무슨 차원의 질서라든가 이런 게 없이 모든 게 그렇게 아수라장이 돼 버리고 말았죠. 그렇게 살다가 보니까, 이 지수화풍도 하나하나가 생명이 있는 거고 하나하나가 그 마음이 있는 거라, 모든 게 종합이 돼서 도저히 이렇게 해 가지고는 될 수가 없다. 이건 개벽을 해야만 되겠다. 말하자면 개벽이 아니라 개혁이죠. 개혁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이 생명체들로 하여금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게 됨으로써, 즉 말하자면 개벽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자체, 개혁을 한 거죠.
개혁을 하고 나니까 어떠한 것이 생겼느냐 하면 질서도 지키게 됨으로써 감각이나 지각이나 시각胎江▨胎뺐▨蕩隔?이 여섯 가지에 달하는 문제들이 제각기 등장을 하게 된 거죠. 차원에 따라서 여섯 가지가 다 등장이 되지 않은 것도 있고 여섯 가지가 등장이 된 것도 있고, 차원에 따라서 세 가지만 된 것도 있고 두 가지만 된 것도 있고 한 가지만 된 것도 있고, 그 차원에 따라서 종류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등장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또 개혁을 한 것은 크고 작은 것을 조절하고 제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그 문에 들게 한 것도 됩니다. 그래 가지고 모든 생물이 살다 보니까 그때에 태어났던 생명체들이 개혁에 따라서 다시 태어나게 되니까 다시 태어난 짐승들은 모두가 소식(小食)을 하게 됐답니다. 그래서 풀을 먹고 사는 짐승들이 있는가 하면 또는 자기 자신들의 생사를 거론할 수 있게도 됐답니다.
우리가 처음 태어나서는 생사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실천하고 이러다 보니까, 제일 나중에는 사람까지 등장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돼 가지고 생사를 논의하게 되다 보니까 아, 이 불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귀중하구나! 이 불성이라는 것도 귀중하지만 최초에 우리가 어디서 생겨났나?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됐죠. 먼저 태어나서 경험한 사람들은 전부 사람이 살 수 있는 농사일들이라든가, 사람이 살아나가고 연구하고 실천하고 하는 이 생활 도법을 그대로 익히면서, 또 가르침을 받아 가면서, 연쇄적으로 차원을 높이면서 이렇게 하다 보니까 우리가 불성이 근중한 줄 알게 됐더랍니다.
우리 이 불로 인해서 생명체들이 찾아왔다고 그래서 과거 몇 억겁 전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현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지수화풍으로써 뭉쳐서 지수화풍을 또 먹고 삽니다. 그런데 지수화풍으로부터 와서 지수화풍으로 또 가죠. 지수화풍으로 또 가면 사대(四大)가 흩어져 버려 지수화풍 자체가 제각기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 소립니다. 즉 말하자면 불바퀴다 불기둥이다 이런다면 불 하나의 기둥에서, 쉽게 말해 그 불바퀴에서 모든 게, 마음이라는 입자가 나간다면 그게 바로 또 불바퀴가 되고 또 원자가 됩니다. 그렇듯이 인간의 그 생명의 창조도 역시 마음으로써 그 원자, 근본 하나에서 또 입자로 종자를 만들면 그 종자가 씨가 되고 씨가 돼서 싹이 되고 싹이 돼서 또 종자를 만들고, 이렇게 해서 우리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퍼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촛불재를 그렇게 귀중하게 해야 되느냐. 이 마음의 촛불재를 하는 것은 방편으로써 마음과 더불어 자신과 즉, ‘자(自)’는 이 몸이 되고 ‘신(神)’은 자기 불성(佛性)이 되는 겁니다. 이게 자怠탔?다 둘 아니듯이 촛불재를 하는 것도 마음에 없으면 그 촛불을 들 수가 없습니다. 들질 않게 되죠. 마음에 있으니깐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 가설이 돼 있다고 항상 얘기하죠. 한 가정에 내 자식이다 내 부모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다 가설이 된 겁니다, 그게. 모르는 사람은 전체가 가설이 돼 있다는 것도 모르니 한 가정이라도 그것을 알아야 전체가 다 가설이 돼 있다는 거를 알고 넓고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도 내 마음이 밝혀지면 그 마음도 밝혀진다는 얘깁니다. 자식을 둔 사람들은 또 자식이라는 가설이 돼 있습니다, 부모라는 가설이 돼 있고. 그것이 자연의 마음의 가설입니다. 우리가 전기 가설을 하지 않으면 불이 안 들어오듯이 우리가 스스로서 자식이다 부모다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형제간에도 가설이 돼 있는데 형제간에는 부모와 자식보다는 좀 덜하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덜 가는 겁니다. 친척도 손바닥 다르고 손등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촛불 하나 켜는 데 돌아가신 부모의 마음만 밝아질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밝아져서 양면을 다 밝아지게 할 수 있는 촛불입니다. 더군다나 조상님들도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쓰고 나온단 말입니다. 그럼 그 모습 쓰고 나온 대로 대접을 받게 돼 있거든요. 잘 생각들을 해 보십시오. 항상 내가 얘기하죠. 개로 태어난다면 개 대접밖에 못 받고 짐승으로 태어난다면 짐승 대접밖엔 못 받는다. 돼지로 태어난다면 돼지 대접을 받을 거고 닭으로 태어난다면 닭 대접밖에 못 받는다. 사람으로 태어나도 천하게 태어나면 천한 대접밖에 못 받는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걸망 짊어지고 한 철 나와서 모두 모여서 놀다가 해가 지면 제각기 헤어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깐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놀고 어떻게 말을 하고, 그러한 데에 따라서 금방 찰나에 벌써 한 생이 지나고 무대가 내리면 벌써 요 다음의 모습은 자기가 사는 데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정해지죠. 그러니까 요 한동안 우리가 혼자 와서 모두 같이 놀다가 가는 거와 같은 거예요, 우리 인생이.
그리고 꿈도 생시도 둘이 아니란 얘기죠. 둘이 아닌 까닭에 여러분이 꿈을 잘못 꿨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도 ‘어허! 이거는 주인공의 뜻이니까 그것도 잘되게 하는 것도 너뿐이야.’ 하고 이렇게 바꾸어 놓으면 구정물을 그냥 삽시간에 맑은 물로 바꾸어 놓는 거죠. 체는 바꾸어 놓을 수 없어도 바로 그 뜻은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체로 나오는 게 말갛게 나온단 얘기죠.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서 아, 한 생을 살아나가는 데에 아주 값진 내 보배를 내 보배로 활용해서 살아가시면서 발전하고 또는 체험하시고, 장래의 2세들한테도 그 모든 묘법이 미치게끔 하고 부모에게도 손색이 없이 밝아지게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그렇게 그것이 귀중하다는 거를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저 거기서 조금 조금 챙겨서 자기가 잘 생각해 보면 알 바가 있습니다. 대충 그냥 이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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