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거운 짐 벗으려면…
본문
질문
인생은 고해의 바다라고 하지 않나요? 요즘같이 이렇게 먹고살기도 버겁고 힘든 세상에 스님께서는 어찌 삶은 고가 아니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이 마음도리를 잘 모르지만 이제 관심을 가져 보려 합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삶의 이 무거운 짐들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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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여러분은 여러분의 근본이라는 그 자체가, 자기 자성이 바로, 자기 주처가 자기한테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로 세상이 벌어지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이 몸속의 생명들이 전부,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것도 다 거기서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움죽거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진실하고 거짓이 없고 질서정연합니다. 내가 해야 내가 갖고,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행복한 거지 남이 행복한 걸 갖다 주거나 뺏어가거나 이런 거 없습니다. 여러분, 대신 배부르게 밥 먹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신 똥 눠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신 또 잠을 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파 주고 죽어 주고 깨달아 주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결국은 여러분이 홀로 와서 홀로 해야만 할 문제는 해야 한다 이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길에서 길을 찾는다는 격도 있지요. 길은 육이 다니는 길이고 마음이 다니는 길은, 길 아닌 길이거든요.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고. 여러분이 여기 오실 때도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고 오셨지요? 그런데 어디로 갔습니까? 그 발자국 떼어 놓은 것이 말입니다. 짊어지고 오시진 않았을 텐데. 한 발짝 한 발짝 딛고 왔는데 그 발자국 떼어 놓은 것은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졌다 이겁니다. 우리가 살림하는 데, 모두 생활하는 데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삶은 고가 없다!’ 여러분의 생각이 모자라서 팔자 운명이라든가 고가 있는 거지, 여러분의 생각이 그렇게 현명하다면 고는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어떠한 거를 나라고 세울 게 없고, 내가 했다고 할 게 없고, 내 몸이 있다고 할 게 없고, 모두가 첨보해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데 어떻게 내가, 이 물 한 그릇을 먹었을 때도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들이 더불어 같이 먹었는데. 그러니까 모두 여러분은 없는 것입니다. 없기 때문에 함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차원을 좀더 삶의 차원과 인생의 차원, 또는 우주 삼라만상의 차원, 모든 거를 결부시켜서 차곡차곡 한 번 한 번 생각해 보신다면 그게 지혜로워지고 바다와 같아져요. 그럼으로써 어떠한 여건도 고가 될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신이 있어서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의 자성신 즉, 주처, 자기 주처가 있기 때문에, 얼른 쉽게 말해서 자기 뿌리가 있기 때문에 싹이 있는 것이지 그 싹이 딴 이름과 형상을 믿고 기도를 하면서 ‘에너지를 주시오.’ 하고 앨 써 보더라도 에너지가 그리로 안 가요. 자기 뿌리에서만이 에너지가 올라오지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배를 타고 허허바다를 건너가는데 선장은 본체만체하고 자기네들끼리 배를 타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배가 그냥 뒤집히겠지요. 그럴 때 뭐라고 합니까? ‘부처님!’ 하는 사람도 있겠고, ‘주여!’ 하는 사람도 있겠고, 별 신의 이름을 다 불러 대고 야단법석들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죠. 모든 마음은 선장한테다 맡겨 놓고 이렇게 좌왕우왕하지 않고 한군데 한마음으로 맡겨 놓는다면 가는 데까지는 무난히 배가 뒤집히지 않고 갈 수 있어요. 그렇듯이 우리는 항상 그저 의식에서 나오는 거, 이 여러분이 잘못 생각하면 유전성이나 영계성, 업보성, 인과성, 세균성 이런 것이 툭툭 튀어나오는 원인이 어딨는가? 여러분이 진짜로 그렇게 내 싹이 내 뿌리를 믿고 의지하면서 ‘너만이 싹을 푸르게 살게 할 수 있어.’ 하고 관할 때에 그것이 관하는 대로 대뇌로 통신이 돼 가지고 대뇌에서 사대로 통신이 된단 말입니다.
이 마음의 빠른 이치란, 통신처라는 건 빛보다도 더 우수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대로 통신이 되면 즉시 어디로 가느냐? 정수로 올라갑니다. 정수로 해서, 정수는 뭘 뜻하느냐? 자동적인 컴퓨터와 같은 겁니다. 거기에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의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나가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절대로 거짓이 아닙니다, 이거는. 심성의학이라고 해도 되고, 심성과학이라고도 해도 되고, 심성 천체물리학이라고 해도 됩니다.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긴 하지만 진리를 참구하고 진리를 연구하고 진리를 배워서 우리가 갖추어 가지고 여여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예가 있지요. 예전에 육조 스님은 “내가 불성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불성이 있기 때문에 여여한 줄 어찌 알았으리까. 또는 불성이 있는 까닭에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불성이 있는 까닭에 만법을 들이고 낼 줄 어찌 알았으리까. 불성이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있고 우리를 이끌어 가기 때문에 자유자재하는 줄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셨죠.
여러분이 사시면서 인간이 그냥 먹고만 살면 그냥 제일인 줄 알지 마시고, 누가 굶으라는 거 아니잖아요? 돈을 벌지 말라는 것도 아니죠. 어떤 거를 하더라도 그건 자기 게 아니에요. 더불어 같이 사는 한 개체에, 즉 말하자면 속해 있는 거지요. 그래서 자기 거라고 생각이 안 된다면 이 세상의 인간뿐만 아니라 미생물에서부터 천차만별의 생명들, 인간까지 살아나가는 그 원리를 다 알게 됨으로서 모든 생명을 내 생명같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모습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말입니다. 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이 세상은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마저도 없이 그냥 여여하게 돌아가는구나, 초월해서.’ 하고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게 된다면, 자기 뿌리가 자기 불성이라는 거,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자아부처라고도 합니다. 그런다면 아파도 ‘오직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하면 의사가 돼 줍니다. 또 ‘너만이 이 가난한 거를 좀더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아?’ 하면 관세음보살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게 보디가드도 돼 줄 수 있고 이끌어 주는 길잡이도 돼 줄 수 있고 해결사도 돼 줄 수 있고, 모든 게 돼 줄 수 있는 거는 바로 자기 원자에서 입자가 나와서 다 조절해 주듯이 그렇게 자기 주인공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인공, 내 불성은 다 팽개치고 그저 기도를 하면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직 달라고 한다면 그거는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자성신이 없다면 자기 몸뚱이는 나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송장이 되는 겁니다. 자기 영혼의 근본이 빠지면 어떻게 사람이 살 수가 있겠습니까? 번연히 그렇게 알면서도, 왜 그 싹은 진실된 자기 뿌리를 의지해서 진짜 푸르게 살 수 있는 건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합니까? “진짜 네 주인공을 네가 믿고 정말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만이 살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요, 이름만 ‘주인공! 주인공!’ 부르지 진짜로 믿지를 않아요. 자기를 자기가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어요? 이 세상에 누가 대신 살아 준다고 믿습니까? 자기 자성 이 자체가 바로 영원한 자기의 생명의 근본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고라고 무겁게 짊어지지 마시고 일체를 영원한 자기의 근본 자리에 맡겨 놓고 나는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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