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되면 조상 탓?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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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면 조상 탓?

본문

질문

우리가 속된 말로 흔히 잘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을 하게 되는데 사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조상님들과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도재도 지내고 그러는 거 아닌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내가 지금 물 한 그릇을 먹는 데도 우주 천체가 먹고도 이 물 한 그릇이 되남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또 남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부모가 돌아가셨다 한다면 촛불을 켜 놓고 향을 피워 놓고 위패를 써 놓고 그러고서 모시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보다도 내 마음의 향을 피우고 내 마음의 촛불을 켜 놓고서 가만히 그 은공을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인등이거든요. 그 은혜를 갚는 마음, 모든 걸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 관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위로는 묵은 빚을 갚는 일이죠. 또 아래로 햇빛을 주려면 그런 능력을 길러야만 되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모두가 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 먹는 밥 한 그릇을 놓고도 천도를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는 모시고 아래로는 이 육신 안에 들어 있는 생명들을 제도하면서, 바깥으로는 부모를 모시고 그렇게 가지만 육의 부모나 법의 부모나, 부처님 조상이나 육의 조상이나 둘이 아닌 겁니다. 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부처님이 중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둘로 보지 마세요, 그것도. 왜 구차하게 삽니까? 왜 그렇게 자기가 얼기설기 해 놓고 자기가 고달프게 삽니까? ‘주인공’이라고 하면 그 안에 부처도 중생도, 또는 육의 부모의 조상도 다 같이 응하고 계신데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항상 생각합니다. 내가 맛있는 걸 먹으면 우리 육의 부모, 그 전의 부모도 부처님도 다 거기서 받으시고 또는 내가 맛없는 걸 먹으면 맛없는 것대로 또 같이 먹고. 그러면 이 뱃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도 다 같이 먹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다 그러시죠? 여러분은 보고 응감만 했지, 이 속에 있는 중생들이 다 달라고 해서 이 입만 빌려 주곤 넣는 거예요. 넣을 때 여러분은 맛만 보고 진짜 먹는 건 이 속에서 다 먹거든요. 여러분은 씹어 가지고 넘어갈 때 맛만 보는 겁니다. 그러고는 그 속에 들어가면 다 제가끔들 섭취를 합니다. 먹으면서 작업을 하면서. 작업을 안 해 주면 자기가 자꾸 먹을 수가 없거든요. 작은 고기도 큰 고기의 지느러미를 다 청소해 주고 거기서 얻어먹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주고받고, 주고받고 이렇게 먹고살거든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수화풍도 얼마나 고마운가. 지수화풍이 계합이 되지 않았으면 생명이 나질 않았어요. 그런데다가 공기가 조금만 없어도 우리는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요. 그런데 고맙다고 한 번이나 해 봤습니까? 또 물이 없어도 우리는 죽겠지요. 그러면서도 물이 고마운 줄 모르죠. 물이 있을 때는 펑펑 씁니다, 그냥. 아까운 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물도 절약을, 아주 광신적으로 절약을 하라는 게 아니라 정도껏 분수껏 쓰라는 거죠. 불도 그렇고 물도 그렇고. 이 물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흙을 딛고 흙에서 나는 걸 먹고 흙에서 자랐어요. 그러니 모든 것이 우리는 지금 고마운 거죠.

그리고 자기 몸뚱이 자체가 바탕이 된다면 그 바탕 속에 자기 근본이 있기 때문에 또 고마운 거죠. 자기가 자기 고마운 줄 안다면 우주 법계가 다 고맙다는 그 뜻이 전체 한마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모두 한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데로 나오게끔 돌봐주는데 어찌 안되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부터 보이는 데로 나오는 거거든요. 그게 심성과학이에요. 천체물리학이라고 해도 되고요.

그러니까 이 몸뚱이 가진 것이 여러분이 아니라 그 몸뚱이 속의 영원한 자기의 근본이 자기예요. 그 참자기가, 즉 말하자면 소라껍데기를 해 놓고 그 알맹이가 소라 속에 들어가서 소라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집이 나쁘면 또 갈아서 들어가요. 그럼 껍데기 속에 껍데기가 있고 껍데기 속에 또 껍데기가 있거든요. 그렇듯이 우리는 지금 껍데기를 끌고 다니는 겁니다. 잘 끌고 다니죠. 어디가 바숴지면 안 되니깐요. 부딪쳐서 바숴지면 안 되고 고장이 나고 집이 망가지면 내가 집에 들어 있을 수가 없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뜻으로 본다면, 돌아가신 분들 천도를 시킬 때에도 그렇고 제사 지낼 때도 위패를 해 놓고 하죠. 거기 안주하라고 하는 거거든요. 안주할 데가 없으면 지접을 못하니까. 꽃이라도 갖다 놓고 거기 안주하라고 하죠. 그래서 산소에 가거나 이래도 꽃을 한 송이 이렇게 가져가죠. 잠시라도, 우리가 서로 보이지 않더라도 그 마음만은 같이 상봉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혼백은 거기만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만 계신 게 아니고 그건 체가 없기 때문에 어디고 상봉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법의 부모든 육의 부모든 다 주인공에다 넣고 그냥 나를 집으로 삼아서 거기서 살게 해 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부모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체가 없는 거니까 그 혼백을 내 속에다가, 다 주인공 안에다 넣어 놓으면 아, 그냥 내가 되는 거죠, 그냥. 내가 집이 돼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왜 바깥으로 끄달리고 잘되게 해 달라고 빌고, 잘되게 해 주기는 뭘 잘되게 해 줍니까. 자기가 거기다 넣고 그렇게 주인공에 하나로 다 모아서 ‘다 그냥 일체다’ 할 때 그 혼백도 다 자기 마음 쓰는 대로 배우는 거예요, 물리가 터지고. 아, 그래야 만 중생을 다 제도할 수 있는 보살로 화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게 있는 것을 모르고 이사를 가도 항상 ‘아이구, 이거 어느 날 이사 가야 좋을까? 올해는 또 삼재가 안 들었을까? 우리 아빠가 언짢으면 어떡하지. 우리 자식이 언짢으면 어떡하지. 가게를 하는데 영 안돼. 그럼 뭐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조상이 어떻게 잘못되지나 않았나.’ 그런단 말입니다. 조상은 왜 들먹입니까, 글쎄? 아니 자식들을 길러서 그렇게 해 준 것도 고마운데 조상 탓을 왜 생각을 합니까?

물론 죽으면 냉정하고 죽으면 사정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하곤 정 반대죠. 언제 적의 부모고 언제 적의 자식입니까? 자식 부모라는 걸 아예 상실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해를 입힐 수도 있는 거죠. 인연에 따라서 해를 입히는 걸 바로 과(果)라고 그럽니다. 인연에 따라서 오는 과. 그러니까 모든 걸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 여러분이 늠름하고 당당하게 사신다면 앞으로 부모도 자식도, 또는 형제도 잘 이렇게 이끌어 갈 수 있고 걱정할 것도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괜히들 걱정인 거예요. 괜히들 발버둥일 친단 말입니다, 모두. 그러니까 집안에 어떠한 어려운 일이 생겼다, 급하다 이렇게 얘기를 들었으면 금방 이 주인공에 맡겨 놓으면 여기에서 거기에 알맞게 용도에 맞게 나와 줍니다. 몸이 아파서 뭐 어떻게 됐다 그러면 금방 자기 속에서 약사가 그리로 그냥 통신을 하게 됩니다. 빛보다 더 빠른 광력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 몸에 찰나에 들어가서 찰나에 해결하고 찰나에 나죠. 이러한 도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모릅니다. 그러니 조상 탓 하지 마시고 열심히 이 마음공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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