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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에 왜 대통령의 등을 달아야 하는지

본문

질문

2010년 초파일 행사가 있는 선원에 갔을 때, 법당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큰 연등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법당을 밝히는 큰 등의 꼬리에는 큰스님, 스님들, 사부대중, 그리고 대통령과 영부인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대통령과 영부인의 이름이 쓰여진 그 연등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많은 국민들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기독교 장로의 이름을 거기에 써 넣다니요. 말할 수 없는 분개마저 일어났습니다. 올해 초파일에는 그 등이 걸려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질문하신 분이 불자라고 한다면 “진짜 불자가 되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연등을 켜는 자체가 아주 귀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냐. 내가 한생각을 어떻게 냈느냐에 따라서 불이 사방을 훤히 밝히는 것이지 보이는 등불만 환하게 켰다고 해서 그게 불을 밝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등을 켠다는 것은 누구 한 사람의 일신을 위해서 등을 켜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와, 일체 모든 만물만생과 더불어 같이 한 등을 켠다는 한마음으로서, 그런 마음의 불을 켜는 의미에서 연등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등을 켠다는 것은 내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방편의 의식인 것이지요. 그러니 수억겁을 이끌어 오면서 공부시키고, 진화시켜온 나의 근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극하게 불을 밝혀야 되는 거예요. 일체(一切)와 직결된 나의 마음에 불을 밝힘으로써 위로는 조상님과 아래로는 일체 자손들의 마음에도 불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라면 그 나라의 부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못났다 해도 남의 부모와 바꿀 수 있겠습니까. 잘난 남의 부모보다 찌그러진 내 부모가 그래도 내 부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뭐 좀 못났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가족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세상을 내다보세요. 모두가 끼리끼리 놓여 있죠. 금은 금대로 나가게 되고 또는 콩씨는 콩씨대로 나가게 되고 팥씨는 팥씨대로 나가게 돼 있습니다. 자기가 산 대로, 지은 대로, 차원이 그대로니까 그 차원대로 이 세상에 다시 출현을 해서 사는 겁니다. 작든 크든 모두 다 생긴 것도 다르지만 모두가 차원들도 달라서 이 세상에 이거 할 소임을 맡을 사람이 있고 저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저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그릇대로 모든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릇들을 보십시오. 종지가 있는가 하면 접시가 있고 그렇게 여러 층으로 돼 있듯이 사람들의 차원도 그렇고, 도랑물이 있으면 바다가 있고 연못이 있으면 그걸 썩지 않게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구성돼야만이 우리가 썩지 않고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원망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런데 모두 마음들이 무(無)의 세계 50%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론이나 학술적으로, 또는 모든 거를 아주 전체 잘 배우고 안다 하더라도, 이거는 유(有)의 세계의 50%에 관한 건입니다. 무의 세계 50%를 모른다면 물질세계의 일을 아무리 잘 배웠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종교다 이러질 마시고 ‘나는 진리를 파악하겠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저 진리를 파악하고 진리를 연구하고 진리를 배우는데 무슨 놈의 기독교, 가톨릭교, 불교가 따로따로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불교라는 단어는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그런 불교가 아니라 전 세계 전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다 포용할 수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물이 골짜기의 물이든 연못의 물이든, 비의 물이든, 구정물이든 더러운 물이든, 핏물이든 고름물이든, 다 바다로 들어가도 바다의 물은 다 수용을 합니다. 말없이 말입니다. 저 나무 이파리 하나, 풀포기 하나도 생명이 없는 게 없기 때문에 그 생명이 있는 거는 다 불교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네 종교 내 종교 찾을 것도 없이 지구가 항아리라면 항아리 속에서 같이 이렇게 내 자리, 네 자리 하고 싸울 게 아니라 우리 이 마음이 지구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어야 지구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듯이, 내 몸속에서 내 마음이 훌렁 벗어나야 앉아서도 전 우주의 근본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고 통신할 수 있고, 또 들이고 내는 작업을 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내 마음과 둘이 아니게 할 수 있고, 둘이 아니게 아픈 것을 건져 줄 수 있고, 그런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이 한 울에 한마음으로,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가정을 이끌어 가고 조화를 이루며 이렇게 살아나갈 수 있다 이겁니다.

저 하늘의 해가 일체 만물을 따뜻하게 비춰 주고 키워 줍니다. 우리도 생활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씨로 따뜻한 지혜로써 말도 부드럽게 하고 행동도 부드럽게 하고 생각 생각이 부드러운 지혜로써 서로 융합해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해와 같은 겁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하면 남의 마음도 따뜻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한데 어찌 남의 마음이 따뜻할 때를 바라겠습니까? 내 마음이 악하게 되면 그건 무간지옥이라 그랬습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선하고 착하고 밝고 깨끗하게, 정심으로서 지혜롭게 따뜻한 마음으로 둘이 아니게 모든 일체 사람들을 대하고 일체 중생을 대하고, 가정을 대하고 상대를, 모든 거를 대한다면, 마음은 체가 없는 거라 스스로 상대도 밝아져서 나와 더불어 밝게 불을 켤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아주 악한 마음을 가지고 다가서더라도 ‘아, 저 사람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닌데, 다 마음을 밝게 해서 그저 한마음이 되게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자기 근본 자리에다 맡겨 놓으세요. 그러고 증오심을 버리시고요. 그런 것도 거기다 맡기시고 그냥 편안하게, 알지도 못하고 자기 사량으로 생각을 하고, 자기를 망하게 했다고 하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즉 말하자면 그냥 ‘내가 사량(思量)으로 남을 오해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잘못됐다고만 할 게 아니라 또 잘할 수도 있는 문제가 생기니까, 하여튼 모든 것은 당신만이 의합하게 같이 불이 들어와서 같이 밝은 데서 살게끔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겼을 때에 그 사람 가슴에도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렇다 저렇다 시비하지 마세요. 우리가 서로 시비를 하고 화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나라, 이 세계, 아니 전체 우주를 싸안는 촛불을 들고 앞장설 수 있겠습니까. 절대 시비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지구라는 이 항아리 속에서 우리가 꼼딱거리면서 그렇게 지혜를 넓히고 지구를 굴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생각은 안 하고 항상 조그만 거 가지고 싸움이나 하고 조그만 거 가지고 서로 뜯고 화합을 가져오지 못하는 이러한 국민이 돼서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돼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질문하신 분이 불자라고 한다면 이러한 일을 계기로 진짜 불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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