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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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절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부처님 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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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사실 부처님이라는 것도 이름인 것입니다. 그것은 즉 말하자면 똑바른 ‘참사람’, 참사람이라는 것이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 참사람 되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말고 또는 참사람 아니 된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점의 공한 자리에,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 다시 놓는다면, 다시 맡겨 놓고 믿음을 진실하게 갖는다면,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바로 거기에서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서 알게 되고, 그때는 부처님의 마음도 모든 중생들의 마음도, 모든 걸 다 알게 되며 남한테 해하지 않는 마음,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 됩니다. 이 자비라는, 헐고 깨끗하고 더럽고 이런 것이 몰락 없는, 높고 낮음도 없고 부처 중생도 없는 고러한 한 점의 그 내놓을 게 없는 이런 빈 그릇 자체가 바로 우리가 찰나찰나 나투면서 밝게 비추어 주는 바로 손 없는 손이요, 발 없는 발이요, 길 없는 길이라. 이름하여 평손이요, 평발이요, 이것이 바로 한 손 들어서 천지를 삿갓으로 쓰고 한 손 들어 해와 달을 꿰어 굴리면서, 한 발 들어 이산 저산 푸른 산 한 발 디디니, 목마르면 물 마시고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는 말이 얼마나 참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참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여러분이 목마를 때 물 먹겠다 하고 계산하고 먹습니까? 무심으로 그냥 떠먹습니다. 그게 바로 참사람의 활용이에요. 여러분이 금을 가졌다면 그걸 얼른 내놓지 않지만 걸레를 빨아 쥐었다면 빨리 내던질 겁니다. 빨리 빨아서 얼른 짜서 놓습니다. 금을 가졌더라도 그렇게 빨리 짜서 걸레 놓듯 하십시오. 신발 벗어 놓고 올라가듯. 아시겠습니까? 금을 가졌다고 해서 이걸 소중히 생각하는 건 절대 금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갖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관리인만 되라는 얘깁니다. 착을 두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분수를 알고 살고 건너뛰지 못할 걸 건너뛰다가 개천에 빠지지 말고, 구덩이에 빠지지 말고 서서히 침착하게, 산이 태산같이 이렇게 있으면 서서히 돌아가고, 구덩이가 있으면 구덩이에 채워 놓고 물이 흐르듯이, 이렇게 침착하게, 어떠한 악조건이 닥친다 하더라도 안으로 굴리면서 그 자기 주인공 한 점에,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 거니까, 자기로 인해서 나온 거니까, 잘못했든 잘했든 자기가 있으니까 나온 거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고서 한번 안으로 굴려서 바로 다시 놓는 그런 그 침착한 마음, 그리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을 갖는다면 스스로서 수레바퀴 돌듯 합니다, 시간과 공간도 없이.
이것이 참사람의 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이라기보다도 참사람의 법을 알아야 그 부처님의 가르쳐 주신 그 뜻도 알 것이요, 우리가 한마디 한마디 해 놓으신 그 뜻을 바로 우린 지금 현실에 맞추어서 현실의 용어로 대치해서 그것을 서로에 이득이 있고 공덕이 되게끔 이렇게 전달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악조건의 구정물 핏물 고름물을 전부 한데 합쳐서 말갛게 만들어서 생수물을 해서 떠 주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한 방울의 생수가 아니라면 이건 전달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그 뜻을 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마디 같이 안 해도 오고 감이 없이 전달이 되고, 미국이다 할지라도 그 마음만 내면은 서로 전달이 되고, 돌하고도 말을 하게 되고 일체 만물과 더불어 같이 서로 말을 하고 서로 듣고, 서로 공생하고 공체로서 돌아가는 조화를 이루니 그것이 바로 보살이며, 부처며, 그것이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를 자기한테다 두고 자기 몸뚱이는 탑돌이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변소에 들어가면 부처가 없습니까? 법당의 형상만 부첩니까. 그 형상이 자기 형상이요, 그 마음이 내 마음이요, 모두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아마도 부처님이, 그 부처님 마음이 바로 자기 마음이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을 부처가 알고 부처가 아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으니 자기는 껄껄 웃을 겁니다. 한 번 하늘을 쳐다보고 웃고 한 번 땅을 내려다보고 눈물을 흘려서 자비로서의 이 만물을 다 양식으로서 적셔 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반문해 보십시오. 나는 이날까지 살면서 ‘부처가 돼야지. 내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왜? 사람은 어디까지나 지옥을 거치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듯이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자기가 경험 안 해 본 것은 아픈 줄도 모르죠. ‘아! 남이 그렇게 아팠다더라.’ 이런 정도지, 그렇게 실감나게 아파 보지 못합니다. 어디고 한 번씩은 다 들어가서, 물 속에도 빠져보기도 하고, 불 속에도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떡그릇에도 엎드러져 보기도 하고, 번연히 알면서도 엎드려져 보는 그러한 패기가 있어야 하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이 공부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자면서 먹을 줄 알아야 하고, 먹으면서 쌀 줄 알아야 되고, 싸면서 잘 줄을 알아야 한다. 이건 끊임없는 길을 말하는 겁니다. 자는 것은 푹, 우리가 모든 것을 한 점에서, 그 공한 한 점에서 나오는 거 한 점에다 다시 맡겨 놓는 작업을 하는데, 습이 다 떨어져서 녹아 버리니까 그만 푹 쉰 거를 말하는 겁니다. 그 푹 쉰 사람이, 빈 그릇이 된 그 사람이 만약에 이 모든 법을 굴린다면 하나 깔축없이 걸림 없이 굴릴 거라 이겁니다. 담았다 꺼냈다 담았다 꺼냈다 해도 항상 그릇은 비어 있을 테니까. 그러니 그렇게 담았다 꺼냈다 담았다 꺼냈다 하는 게 아니라 담으면 싸 버려요, 담으면 싸고 담으면 싸고. 싸면서 또 자. 이 세 가지의 뜻이, 우리가 평생을 배워도 못다 배우는 이런 진리가 거기에, 근본이 거기 들었어요. 자고 먹고 싼다 하는 그 세 마디에 다 들어 있다 이겁니다, 부처님 법이.
이 도리에는 꿈도 생시도 없고 낮과 밤도 없는 것입니다. 동太도 둘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잘 적에도 길을 인도하는 당신이, 모든 걸 내고 들이는 당신이 나를 잘 이끌어서 나의 사량적인 이 분별을, 모든 거를 길을 밝혀 달라고 하는 그 마음으로서 그냥 관하고, 도대체 참 당신은 내가 알 길이 없으니까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진실된 마음으로서 화두를 잡고, 내 공한 몸뚱이가 화두니 그 몸뚱이에서 나오는 거 몸뚱이에다 다시 놓고, 믿고 거기에다가 모든 걸 놔요. 그런다면은 자기가 억겁을 거쳐서 나온 그 습, 종문서는 몽땅 타 버릴 테니까. 내놓을 수 없는 원자력이거든요. 자력이 돼서 그냥 닿기만 하면, 갖다 놓기만 하면 타 버리는 거죠. 그래서 스스로서 자기 눈에서는 자기 모르는 눈물이 스스로 흐르게 되고, 그 흐르게 되는 눈물은 바로 그 습의 업이 그대로 녹아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진짜로 나는 여기를 믿고 다닙니다. 나는 공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요. 자기를 자기가 못 믿고 자기가 자기 부처를 못 믿고 자기 형상만 보니까 자기를 자기가 못 믿죠. 자기 그 공한 빈 그릇을 모르니까. 고정된 게 어딨다고 그게 비지 않았다는 겁니까, 모두가. 자기가 어디 있나요? 어떤 사람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요? 남편을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요, 부모를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요, 자식을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요. 순간순간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는데. 그러니 공했다는 건데, 그렇게 무수히 나오는 그 자체가 바로 그 공한 데서 나오는 것이니 거기다가 맡겨 놓고 자기는 거기서 형성된 거니까 그대로 공부하다 보면은 그대로 자기 마음과 실상이 나와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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