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모든 경계 지혜롭게 해결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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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음공부를 한다 하면서도 어떤 문제는 마음을 비우고 잘 관해지지만 어떤 문제는 거기에 끄달려 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떡하면 닥치는 모든 경계를 지혜롭게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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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제일 첫째에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걸어왔든 앞으로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그 진리 속에 어떻게 해야만이 그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것을 그렇게 항상 그릇을 비울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참는다면, 속으로 참고 내색을 안 하고 좋은 소리를 하고 그래도 그건 참는 까닭에 항상 그릇에 넘쳐 담기지 않죠. 참는 게 아니라 한 발 떼어 놓는 것과 같이 놓아라 이런 소립니다. 우리 진리가 지구를 한 바퀴 돈다고 하더라도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그렇듯이 사람도 한 발 한 발 떼 놓고 가는 것이 징검다리를 딛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살이거든요.
불교가 어떤 것이냐 그러지마는 우리가 생명이 있음으로써 몸이 움죽거리죠? 그렇기 때문에 불은 생명이요, 교는 삶이다 이겁니다. 생활이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군데 이게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전체 진리인 것이다 이런 소리죠. 그러면 우리가 현재 모든 생활 속에서 당면해 있는 문제들, 그걸 어떻게 해야만 슬기롭고 지혜롭게 타파해 나갈 수 있는가. 내가 항상 말하지만 자기의 몸 안의 생명들, 의식을 다스릴 수 있는 그 자기의 선장이 있다. 그럼 수많은 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자기를 진화시키고 형성시켜 온 자기 근본이란 얘기죠. 자기 근본을, 즉 말하자면 자기 자불을 이 몸이 한 치도 쉬고 돌아가지 않으니까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자기 주인공에다가 어떠한 화나는 일이 됐더라도, 악한 일이 됐더라도, 부작용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용도에 따라서 항상 '네 속에서 화가 나는 거니까 네 속에서 화를 안 내게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되굴려서 놓는다. 일체를 닥치는 대로 말입니다. 일부러 쫓아가면서 할 필요는 없지만 내 앞에 닥치는 것도 각종에 달하니까. 진짜로 자기를 누가 이끌고 지금 갑니까. 대신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고 대신 먹어 주고 죽어 주고 아파 주고 또는 똥 눠 주고 잠자 주고 그럴 사람 하나도 없죠. 자기 뿌리만이 자기를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흡수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교' 이러면은 모두 이름, 역사, 스님네들이 해 오신 길, 또 스님이 해 오신 길의 이름, 어느 스님, 이렇게 이름 있듯이 이름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그 이름은 바깥에서 방편으로 쓰는 여건이고, 내가 나를 이끌어서 그 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걸 타파할 수 있고 여여할 수 있고 자재할 수 있고 만법을 들이고 낸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이 될 수 있어야만이 되겠기에 자신들을 알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못났든 잘났든 자기 먼저 알아야 상대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 이 하나로 돌아가는 섭류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러더러는 이름을 알아두는 것도 좋지만 그거조차도 그림자, 즉 말하자면 구름 같은 이 몸도 50%가 돼요. 정신계 50%, 물질계 50%가 양면이 다 100%가 돼야 만이 능히 사람이다. 사람이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굴리면서 즉, 한마디로 요약해서 구정물이 나올 낌새가 있으면 맑은 물로 바꿔 쓴다, 이런 도리 말입니다. 여러분한테 항상 여러분의 주장자의 자불은 항상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다 그랬죠? 그거를 모르면 안 됩니다. 그런데 50%, 50%로 바깥의 물질계만 찾는 격이니까 얼마나 끄달리고 걸림이 많고 괴롭겠어요? 그런데 나 아닌 나가 진짜로 있거든요. 지금 나는 육체가 보이지마는 진짜 나는 육체 속에서 나가 보이지 않는 거를 말해요. 보이지 않는 데로부터 보이는 데로 나오니깐요.
내가 예전에 그랬죠. 정수에 물을 붓는다고 이렇게 경전에 있습니다마는 그 물이라는 건 어떠한 파도가 치고 어떠한 비바람이 불어도 항상 그냥 흘러가요, 아랑곳없이. 그와 같이 인간의 정수에는 항상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어서 그렇게 내가 살고 생각하고 하는 대로 거기에 입력이 되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현재의 생활 속에서 모든 게 거기에 입력이 돼야 되는 거기 때문에 그저 지금 현재의 그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놓고 '너만이 지켜 주고 너만이 해결하고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어.' 하고 모든 용도에 따라서 자기한테 닥치는 대로 거기다 놓고, 그렇게 좋은 거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언짢은 거는 굴려서, 자기가 편리한 대로 굴려서 놓는다. 그렇다면 현실에 살기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지금 현실을 내다볼 때에 천안통이고 천이통이고 타심통이고 신족통이고 천이통 숙명통이 다 그냥 바로 보이게 된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예전에 부처님이 말씀해 놓으신 천안통이 지금 현실에 나와 있잖아요. 안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세계를 볼 수 있죠. 또 천이통도 나와 있고요. 전 세계로 전화 안되는 데가 없죠. 너 나 할 것 없이 한번 손가락만 깜작깜작하면 만나죠. 대문 바깥에서 부르면은 문 열어 주는 데도 그 형상이 나타나죠. 우리가 지금 현재에 이렇게 살면서 그것이 바깥으로 그냥 표현이 됐어요. 그만큼 시대가 빨라질 뿐만 아니라 시대가 바뀌어서 지금 진화돼 가고 진화되면서 또 밝아지고 이런다는 거죠.
지금 악이 많다고 하더라도 선이 반이면 악이 반인 것과 같이, 악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죠.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 주어지니까 지금 주어지는 대로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거죠. 근데 이 공부 하면서 아무리 주어진 팔자 운명이라도 자기 한생각이면 그것이 다 묵살된다 이겁니다. 사람의 운명이나 팔자를 고치는 것도 여러분의 한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어떤 땐 애탈 때가 있어요. 자손들이 잘못돼서 걸어가는 길이 비뚤어져서 부모가 울고불고할 때, 자식들이 나가서 안 들어오고 그랬을 때 그 어머니나 아버지가 애타게 전화하시고 그 애원하시는 걸 볼 때, 또는 사고가 나서 자식이 잘못됐을 때, 정상이 아닐 때, 부모가 생각할 때는 마디마디에 피멍이 들 수 있는 그런 위치에서 서 있는 걸 볼 때에 사람이 이 모습들을 가지고 몇 알갱이나 살 양으로들 그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저렇게 끝없이 살아나갈 저 차원을 어떡하면 좀 높여 줄까.
외려 자식들을 붙들고 늘어지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그 모든 팔자 운명이 없어질 텐데. 그 습관, 애착, 사랑이라는 애착에 매달려서 붙들고 있거든요.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모두가 이 세상에 났으면 제가끔들 걸어야 하고 제가끔들 자기만이 자기를 이끌어서 차원을 높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된다는 얘기죠. 아무리 부모가 있어도 부모가 자식 죽는 거를 막을 수 없고, 부모가 죽는 거를 자식이 막을 수가 없어요. 먹는 것도 그렇고 다, 대신 먹어 줄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생활 속에서 어떻게 커버하고 걸음을 걸어야 되느냐. 우리가 징검다리를 걸을 때는 항상 한눈을 팔 수가 없습니다. 첩첩 물인데다가 이 징검다리로 우리 인생을 걸어가게 했다면 그것 잘못 디뎌서 물에 빠지겠나 하고선 그거 보느라고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없듯이, 오직 자기 주인공만이 자기를 지켜 주고 자기를 이끌어 주고 또는 모든 해결은 그로부터 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자기 육신이 움죽거리는 일거수일투족이 다 자기의 근본이 아니라면 움죽거릴 수가 없어요. 그게 빠지면은 송장이 되고 송장이 되면은 사람의 눈에 상대가 보이질 않아서 무효예요, 또.
그래서 공부는 살아 있을 때 공부해야 된다는 결론이죠. 그러니깐 열심히, 뭐 길다 짧다 하지 말고 '왜 이렇게 오래도록 해도 이렇게 안되나.' 하지 말고 의기양양하게 그냥 살고 하되, 모든 거는 주인공이 하는 거라고 믿으세요. 믿지 말래도 믿어야 되죠. 자기 싹이 자기 뿌리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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