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이 기독교로 많이 개종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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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데요, 인터넷을 통하여 대행 스님 법문을 보면서 나름대로 공부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불자들도 투철한 자기 주관이 없으면 거의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불교인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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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개종을 하고 개종을 안 하고 그게 없습니다. 우리 마음입니다. 불교는 어느 한군데 국한된 불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점의 상표처럼 생각하고 이건 내 가게 네 가게 할 수가 없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이 지구를 우리 집이라고 한다면 크나큰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몸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그런 능력과 또는 사회와 국가를 지키는 그 마음의 능력과 더불어 세계를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능력과, 또는 지구를 집이라고 한다면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그런 능력도 피치 못할 사정입니다. 널리 생각한다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과학이 발전되고 있지만 이렇게 기계화로, 물질화로 치달아서 파손시킬 수 있는 그런 핵폭탄이나 수소폭탄, 모두 이런 잠수함을 부수는 그런 그 기계화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그 생명체가 좀 더 부실하고, 자기가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좀 더 약해질 수가 있고 마음대로 그 살 수가 없지 않을까, 앞으로는 점점 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러한 공부를 하고 진리를 타파하고 어떤 석존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가 있다 하더라도 바로 자기 마음의 그 의식 자체를 넣는다면 두드러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수만 개의 영령을, 영혼을 가지고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수없이 빼내도 줄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러한 진리를 배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마음을 가지고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자기 몸뚱이를 옴쭉 못하게 해 놓을 수 있는 그러한 소인의 그 생각이라고 그럴까요? 그러면 어떨까요? 지각으로 우리가 살아야지 소견으로 살아서 되겠습니까? 우리는 소견으로 살면은 지각을 이룰 수 없고 통달할 수가 없습니다. 만날 둘로 보고 네가 망하게 해 줬느니, 내가 잘했느니 하고 내 몸뚱이를 나라고 해서는 절대로 그것은 안 된다는 뜻이죠.
여러분이 지금 차를 가지고 운전수더러 가라고 그래야 그 차를 끌고 가는 거지, 만약에 차더러 "야 자가용아, 빨리 가." 이러고 아무리 외쳐도 그 자가용은 가지 않습니다. 운전수더러 가라고 그런다면 차를 끌고 갑니다. 그런 것같이 우리 믿음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공을 믿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주처는 전 우주와 가설이 돼서 통신이 돼 돌아갑니다.
그럼 우리가 지금 미래에,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지마는 과거도 우리가 짊어지고, 지금 달구지에다 잔뜩 짊어지고 현실에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달구지에 짊어지고 나온 그 인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딜 쳐야 가겠습니까. 그 물건을 끌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소를 믿고, 이 소가 한 짓이니까, 이 달구지에 잔뜩 실은 게 자기가 전에, 내가 나오기 이전에 네가 해서 입력이 된 거니까 그 입력된 데다 다시 맡겨 놓고 '네가 한 짓이니까 네가 해. 네가 할 수밖에 없어.' 하고 주인공에게 모든 걸 맡겨 놓을 때에 비로소 그 인과는 무너지고 업보도 무너지고 또 유전성도 무너지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겁니다. 삽시간에 무너지는 겁니다. 두고두고 무너짐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지 않고, 그러면 누구를 믿습니까? 형상을 믿습니까, 고깃덩어리를 믿습니까, 허공을 믿습니까? 대신 해주 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대신 아파 주기를 합니까 먹어 주기를 합니까? 똥을 눠 줍니까? 자 줍니까? 죽어 줍니까? 누가 해 줍니까? 아무리 친절하지 않아 천에 없어도 대신 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왔고 자기가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가 와서 자기가 할 일을 하고 가야 한다 하는 것은 자기 몸 떨어지기 전에 자기를 알아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게 내가 불성이 '부'라면 지금 현상계에 있는 자기는 바로 '자'입니다. 현재의식과 잠재의식, 이거를 놓고 볼 때에 잠재의식은 현재의식 속에 들어 있고 현재의식은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게 두 가지로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도 이 머리, 이 골도 반쪽으로 나 있습니다. 그리고 구멍이 뚫려서 왔다 갔다 하지요. 그것이 바로 통신만 왔다 갔다 하는겁니다. 거미줄 얽히듯 말입니다. 이 세포가 바로 법계라고 하는 거죠. 우리 혹성이 지구에도 세포가 있고 인간에게도 세포가 있고 어느 물질에게도 세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는 가설이 돼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 우리가 그 뜻을 안다면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한마음으로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이 선원에만 와라, 이거 아닙니다. 어디든지 내가 배울 데가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배워라 이겁니다. 그리고 꼭 부탁할 건 한 가지 있죠. 어디를 가든지 내 주처는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 이건 잊지 말아라 이겁니다. 몸뚱이는 어디를 못 갑니까.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만남도 고정됨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했다고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공한 것도 공했느니라 이런 거거든요. 분별 없다면 공한 것도 공했느니라. 그 공한 것을 어떻게 체험합니까?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공했다는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그 공한 것도 체험할 수가 있느니라. 이런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렵게 어려운 말을 해서 이렇게 경서를 놓고 이렇게 해서 강의를 하듯 이렇게 하기보다는 우리 생활 속에서 체험하면서 시험하면서 내 주처에 맡겨 놓고 지켜본다. 이것은 아주 과학적이기도 하고 실험입니다, 그게.
그리고 체험을 한다면 자기가 당당해지고 늠름해지고 지각으로 살 수 있는 그런 당당한 인간의 그 자유스런 행이 저절로 나오죠. 그러니 얼마나 슬기롭고 자유스럽고 좋습니까? 그런데 이 도리를 배우는 데 내가 그 절이니까 못 가고, 저 교니깐 가고, 이 교기 때문에 불교에 못 오고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못 가라, 가라 이러지 말고, 또 나는 간다 못 간다를 떠나서 내 마음 주처, 즉 하나님도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자기 하나의 임을 발견을 해야만이 모든 임들을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겁니다. 나의 집에 전화를 놓지 않고 남의 집의 전화를 어떻게 소식을 듣습니까? 내 집에 안테나를 세워 놓지 않고 어떻게 남한테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감지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너부터 알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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