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으려면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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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으려면

본문

질문

끊임없이 들고 나는 습기를 녹이고 항복 받고 싶어서 마음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단체에 소속이 되어 공부를 하다 보니 저의 마음에 집중하기보다는 주위 도반들의 모습에 울고 웃고 기뻐하고 실망하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금강경에도 내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은 중생심을 내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는데요, 제 마음을 항복 받고 주위 도반들과 더불어 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가 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질 때는 언제나 나를 세우지 말고, 남을 참견하지 말고, 주변의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남의 탓을 하지 말고, ‘남이 이렇게 해서 이렇다.’ 이러지 마세요. 남의 탓이 절대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놨을 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놨을 때는 그것은 스스로 돌아갑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스스로 돌아갑니다. 완화되고 그것이 아주 스무드하게 돌아가는데, 말로 이게 틀리다 저게 틀리다, 이 사람이 틀리고 저 사람이 틀렸다고 이런다면은 공부하는 거는 틀려 버렸고, 또 한 가지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말만 벌어져 가지고 싸움만 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공부하는 데 심중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그러한 관습적인 습을 몽땅 떼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 탓 안 한다. 남을 원망 안 한다. 남을 증오 안 한다. 남의 말에 끄달려서 돌아가지 않는다. 남을 참견 안 한다. 모든 것은 안으로 굴린다. 참견을 안 하되 참견을 할 수 있는 거는, 내 앞에 닥친 참견은 해야지요. 이 도량에서도 만약에 뭐가 잘못 돌아간다 이럴 때는 자기 생각에, 주인공에 맡겨 놓고 돌아가게 해야지, 이걸 말로 발설을 하고 이 사람이 어떻고 저 사람이 어떻고 이런다면 일이 하나도 해결이 안돼요. 오히려 바깥으로 더 커지죠. 이런 건 다 놔 버리고 자기한테만 오로지, 자기 주인공한테만 맡겨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소리를 들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걸 봤고,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눈에 거슬린 거지 내가 없이 어떻게 거슬립니까?

그런 거를 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끝없는 옛적부터 우리가 가지고 살아온 습을 녹일 수 있으며, 어떻게 내가 그것을 항복을 받을 수 있으며, 또 항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항복을 받고 내가 항복을 하는 건데, 항복을 받는 사람도 나요 항복을 하는 사람도 나다 이겁니다. 육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삼십이상(三十二相)이 구족(具足)하다.’는 그런 말이 있듯이 그대로 산 부처다 하는 겁니다. 산 보살이다, 산 법신이다 이거예요.

그러니 이게 정법이다 사법이다 하기 이전에 그걸 다 놔 버리고, 못났든 잘났든 문이 아니든 문이든 한번 엎드러져 보고 돌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큰 경험이며 보배를 크게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니 남의 말로 ‘팔만대장경에 이렇게 해 놨으니까 요렇게만 가야겠다.’ 이건 모두가 착이에요.

예전엔 그렇게 등대가 있고 등잔이 있고, 기름이 있고 심지가 있고 성냥이 있고 손이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손도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손이 들어지는 거지 그게 억지로 들어지나요? 그리고 또 우리가 책을 본다 하는 것도, ‘글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을 담습니까?’ 이런 것도 있어요. 글자를 쓸 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 거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글을 썼겠습니까? 그래서 글을 보지 말고 그 글 속의 백지의 마음을 봐라 이겁니다. 글씨가 나를 보고 내가 글씨를 보지 말라 이겁니다. 그 글씨 속에 있는 거를, 그대로 글씨 써 놓은 대로 이름을 가지고 상징하지 말고 그 속에는 뭐가 있다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운문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어느 날 대중을 모아 놓고 “이 세상의 모든 게 왈가왈부하는데….”, 다시 말하면 ‘광활한데’ 하는 소립니다. 그러니깐 복잡다단하다는 얘기라고도 볼 수 있겠죠. 종이 울리니 어째서 너희들은 칠조 가사를 입느냐고 하셨답니다. 종소리를 듣고 어째 칠조 가사를 입느냐는, 뭣 때문에 그 칠조 가사를 입느냐 이런 말이죠. 거기에는 참 심중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대중들은 제각기 달리 들은 겁니다. 똑같이 들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아주 심중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을 한마디 간단하게 하셨건만, 그건 말씀이 아닌 말씀이겠지요?

가사에는 칠조 가사, 구조 가사, 오조 가사가 있는데, 최초로 가사를 두를 때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한 폭이면 한 폭, 두 폭이면 두 폭, 한 오락지면 한 오락지 이렇게 시주를 한 거니까, 오조는 조그만 오락지들 모아서 한 거고, 칠 폭을 얻으면 칠조로 하고 또 구 폭을 얻으면 구조로 하고 이렇게 한 걸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심중 깊이 들었겠죠. 우리가 그 뜻을 한번 음미해 본다면 대답을 가벼이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때에 따라서 내 생각의 범위 내에서 내 생각만 하고 남 생각은 안 하고, 남의 속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면서 내 생각대로 말을 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 생각의 차원에 따라서 옳다고 주장하고, 또 내가 아니면은 이런 건 못한다고 하는 자만심, 이런 것 때문에 그르치는 겁니다, 모든 게. 그런데 벌레 하나도 허투루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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