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이 옳은지 소승이 옳은지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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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이 옳은지 소승이 옳은지

본문

질문

대승불교 교단과 소승불교 교단 사이에는 교리의 면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불제자로서 수행의 기준이 다르고 수행의 목적이 다름으로 인하여, 각 교단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배척하며 이단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저희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 비유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조 홍인 선사가 『금강경』 강의를 하시니까 육조 스님께서 그 대답으로 이렇게 말했죠. “불성이 스스로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내 마음이 내 불성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불성이 스스로 끄달리지 않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체 모든 생활이 걸리지 않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이 말입니다. 그다음에 “불성이 스스로 일체 만법을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요건 내가 알아듣기 쉬우라고 조금 더 보태서 말하는 겁니다.그다음에 “불성이 스스로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이랬습니다. 그것을 종합해서, 즉 이 세상 이치를 종합해서 말하자면 삼천대천세계 우주 천하가 다 근본이 있습니다. 그 근본이 어디에 직결돼 있느냐. 마음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다 이겁니다. “천지의 근본은 마음의 근본이니라. 태양의 근본도 마음의 근본이요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이치의 진리는 인간의 마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느니라.” 이랬습니다.

이 마음공부를 하는 데는 대승, 소승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 하면 잘살고 못사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듯이 ‘사람’ 하면 그냥 사람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사람이라고 하죠. 그런데 좀 전에 육조 스님 말씀에 나왔듯이 우리 참인간의 마음,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는 그 마음, 청정한 마음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어떠한 대(對)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음을 청정한 마음이라고 그러죠. 그게 뭔지 일러 드리겠습니다.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고정됨이 없이 찰나 생활을 하는 것을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어저께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마는 아내가 “여보, 인제 오세요?” 하면 남편이 됐습니다. 그랬는데 아이가 “아빠!” 그러고 들어오니까 남편 됐던 건 없어지고 금방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런데 “얘, 아비야! 인제 오니? 나 좀 보자.” 하거든요. 그래서 얼른 또 어머니한테로 가니까 고만 아들이 돼 버렸습니다. 이렇게 화하는 세상입니다. 화해서 찰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고정되게 보는 거, 고정되게 듣는 거, 고정되게 가고 오는 거, 고정되게 먹는 거, 고정되게 만나는 게 있습니까? 이것이 고정되게 머물러져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진리고 도(道)요, 길이고 참선이고 참입니다. 이 공부하는 데는 대승이다 소승이다 이런 게 없습니다. 왜? 간편하게 얘기합시다. 상을 차려 놓는 데에 접시도 있고 종지도 있고 사발도 있고 대접도 있고 큰 접시도 있습니다. 손님들이 많이 오시겠으니까 상에다가 온통 다 차려 놨습니다. 그런데 거기 대승, 소승이 있을까요? 여러분! “종지는 안 쓸 거다. 대접만 쓸 거다.”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종지만 써야겠다. 이게 옳다.’ 이런다면 종지만 가지고 어떻게 상을 차리며 ‘대접만 쓸 거다.’, ‘큰 그릇만 쓸 것이다.’ 한다면 큰 그릇만 가지고 어떻게 쓸 것이며 ‘접시만 쓸 것이다.’ 한다면 접시만 가지고 어떻게 쓸 것입니까? 이걸로 비유합시다.

일체 만법을 일심으로 들이고 낼 때에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느니라.’ 하는 것은 걸리지 않게 몽땅 버려서 몽땅 갖추어 가지고 있게 만드는, 실천궁행하는 법입니다. 실천이 아니라면 부처님이 정법을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론으로만 경을, 팔만대장경을 달달달달 외우고 위로 꿰고 옆으로 꿴다 하더라도 목마를 때 시원한 물 한 그릇 마시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서 사느냐?” 이거는 이차적인 문제죠. 진짜 배고프고 정말 목마르고 갈증이 날 때는 냉장고 문을 턱 열곤 한 그릇 쭉 마시는 겁니다. 그런 뒤에야 죽고 사는 것이 생각나는 것이니 그건 이차적이죠.

목마를 때 그냥 마시는 것이 그대로 찰나의 행이요, 정법이요, 중용입니다. 우리 인간들 사는 것이 바로 불법이요, 참선이며, 그대로 행선입니다. 아주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데, 거기 무슨 이론이 들어갑니까? 거기 무슨 이의가 붙습니까?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프로펠러가 막 돌아가는데 거기 먼지 앉을 게 있습니까? 이것을 잘 판단해서 여러분이 자기 몸과 가정과 사회, 국가는 물론 세계, 우주까지도 한 손에 넣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원통력을 길러서 원심력으로써 행을 하셔야 합니다. 내가, 즉 말하자면 ‘아내다’ 하면 벌써 가설이 된 거고 ‘자식이다’ 하면 가설이 된 겁니다. ‘남편이다’ 하는 것도 가설이 된 겁니다. 전선의 가설이 됐으니까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거기까지 다 불이 들어오거든요. 이것이 바로 만법의 근원입니다. 그렇게 간편한데도 불구하고 이유를 따지고 이게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시비가 왜 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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