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되기를 관한다면 중용의 도가 아닌데
본문
질문
큰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죽는 쪽도 사는 쪽도 양면을 다 놓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한 방향으로 해결하기를 바라고 주인공한테 관하는 게 아니라, 그 양면을 다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道)라고 저는 이해를 하고 있는데요, 한쪽으로 해결되기를 바라고 관하는 것은 그 중용의 도를 벗어난 것인지, 그리고 저희들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함인데 그것을 중용의 도에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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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모든 일체 만법이 바로 당신이 이 세상에 났으니까 당신으로 인해 들고 나죠? 그래서 중심에서 모든 일들을 하시니까 그 중심에다, 당신 뿌리에다가…. 뿌리가 있어야만이 모든 가지, 이파리 또는 그 나무가 스스로 열매도 잘 맺고 그렇게 할 수가 있죠? 뿌리 없는 나무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뿌리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뿌리에다 놓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모든 것이 뿌리에서 나옴으로써 싹도 있지 뿌리가 없는데 싹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댁도 주인공 그 자체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몸이 있는 겁니다. 몸이 있으니까 움죽거리고 있고. 그러니까 그 중심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대로 자기 생각 돌아가는 대로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이리로 저리로 치우치지도 않고, 이리로 집착을 한다 하더라도 집착이 아니요, 저리로 집착을 한다 하더라도 집착이 아니요, 망상이 나온다 하더라도 망상이 아니요, 모든 게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다 되놓고 활발하게 인연에 따라서 활용해라 이겁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거를 보십시오. 저렇게 말없이 설하고 돌아가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모두 부처 아닌 게 없어요. 꽃은 꽃대로 가지각색으로 남을 위로해 주고, 또 극복하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즐겁게 만들고, 마음이 화사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 줘요. 나무들은 또 시원하게 응달을 지어 주기도 하고, 보는 데 눈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하고, 또 추운 데 그냥 뜨듯하게 해 주기도 하고요. 또 나무는 우리가 밑을 닦고 뭐, 매사에 쓰는 종이를 전부 만들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게 보시를 하는 겁니까? 자기 몸뚱이를 다 그냥 보시하는 거예요, 다 그냥. 일체 만물이 다 그렇게 보시를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보시를 하고 가는 겁니까? 그래서 첫째 육바라밀의 무주상 보시, 핵심으로서의 무주상 보시를 해라 이랬습니다.
내가 그전에도 얘기를 했죠. 그 뜨물 한 그릇 얻어먹고 나뭇짐을 해다 주려고 그랬는데, 은사가 그냥 한번 때려 제껴서는 쓰러뜨려 놓고 “이놈아! 나무 한 짐으로써 무주상 보시가 될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행하고 난 뒤에는 ‘아차, 무주상 보시가 이렇게 광대무변한 걸 몰랐구나. 그 핵심적인 여기에서의 한생각이면 무주상 보시의 행을 할 거를 내가 이 나뭇짐을 하느라고 이렇게 끄달렸구나.’ 하곤 그냥 무르팍을 탁 치고, 무르팍 깨진 거를 어루만지면서 ‘고맙다, 고마워.’ 했다는 얘기 말이에요. 이렇게 자비하고 평등하고 묘하고 이런 법을, 우리가 이렇게 모두 재료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른대서야 어떻게 앞으로 실천해 나가며 어떻게 이 혼란한 세상을 헤쳐 나가렵니까. 포교 좀 하고, 다니면서 설법하고, 다니면서 뭐 하나 집어 주고 이러는 게 무주상 보시가 아닙니다. 그거는 새 발의 피예요. 우리가 쌀 수억 가마니를 갖다가 고아원에 줬다고 해도 그건 새 발의 피예요. 물론 물질로도, 물질 아닌 무주상 보시로도 함께 겸용을 해야 이것이 중용이 되죠. 그러나 ‘이거는 아니고 이거는 맞다’ 이런다면 벌써 그 중용은 그냥 해체가 돼 버리고, 진짜 핵심적인 중용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것도 이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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