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가 없는 마음에 어떻게 습이 붙는지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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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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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가 없는 마음에 어떻게 습이 붙는지

본문

질문

스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찰나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습이 붙을 자리도, 업이 붙을 자리도 없다고 하시고 또 우리 중생은 몇억 겁을 거치면서 습이 쌓이고 쌓여 가지고 그 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다고 그러셨는데 체가 없는 마음에 어떻게 습이 붙어 가지고 이생에 와서 중생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지요. 그것을 잘 모르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또 하나는 큰 깨침을 얻으셨다는 어른들께서도 끝까지 그 습이 남아 가지고 가끔은 부지불식간에 그 습의 행동이 나타나는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첫째는, 무조건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하는 거다.’ 하고서 관하는 거고 둘째는, 가정살이 돌아가는 것 전부 ‘그놈이 하는 거니까.’ 하고 관하는 거죠. 그놈이 하는 건데 뭐가 그렇게 답답하고 그렇습니까, 네? 이거 보세요. 내가 말하는 건 잘되고 못되고 그걸 떠나서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답답한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잘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잘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그것이 다 내 속에서 나오는 건데 진짜 우주간 법계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일체제불이 한 골수에 들어서 한자리를 할 수 있다면….” 그 소리 한 겁니다. 내일 죽는다, 이따 죽는다, 우리 식구가 다 멸망한다 이러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결사적인, 나를 버린 그 마음이 정통으로만 들어간다면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뭐가 답답합니까? 그게 다 욕심입니다. 그렇게 생각 안 됩니까?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늠름하게 넘어가면서 진짜 칼을 악으로다 뺄 때는 그냥…. 이거 보세요. 악으로 사는 사람은 진짜 칼을 썩 뺐을 때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됩니다. 그러나 살리는 칼을 썩 뺐을 때는 수많은 중생들을 다 살릴 수 있고 한 나라를 세울 수가 있고, 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전체를 다 한 칼로다가 부릴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답답합니까? 내일 죽으면 어떻고 이따 죽으면 어떻고 식구가 다 죽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안 그렇습니까?

아니, 내가 그 말을 하는데 너무 잔인하고 너무 안됐다고 생각합니까? 아휴 참! 이 세상 이 길, 그냥 걸을 뿐이에요. 우리가 그냥 살 뿐이에요. 왜 사나? 내가 어디서부터 이렇게 와 가지고 지금 무엇을 하고 가는지 알아야 답답하지 않다 이 소립니다. 야! 이거 뭐, 캠핑 와서 잠시 있는데, 내가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 우주간 법계에 다 통신이 되는구나. 이럴지언대 내가 뭘 그렇게 걱정하랴.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요. 소 한 마리를 잡는다 해도 걱정이 없고, 소 한 마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고, 이 세상이 다 없어진대도 걱정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릴 수가 있는 거지, 아니, 그놈의 거 하나하나 걱정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건지고 살릴 수 있습니까? 가정도 그래요. 이판사판이에요. 허허허. 두 가지뿐이야. 죽느냐 사느냐 요거뿐이지 거기에 또 뭐가 붙습니까?

어떤 스님이 날더러 이렇게 말하더군요. “스님, 이 토굴의 문에 못 좀 박아 주십시오.” 그러니까, 난 그런 것도 모르고요, 생각을 안 했으니까 “못 좀 박아 주십시오.” 그래서 “못은 왜?” 그러니까 “들어간 뒤에 바깥에서 못을 박아서 못 나오면, 죽지 않으면 얻을 거 아닙니까? 죽지 않으면 얻고 얻지 못하면 죽고, 이거 둘뿐 아닙니까?” 이거야.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면요, 정말 아주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고 너그럽게 두루 할 수 있고, 항상 싱그레 웃고, 남이 갓 미쳤다고 할 정도로 싱그레 웃고 길을 지나갈 수 있고, 소 둥구리를 봐도 싱그레 웃을 수 있어요. ‘저거 가엾다, 저거 죽으러 가지.’ 뭐, 이런 생각조차 없습니다. 왜? 아주 곧바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소 만 마리를, 아니 어떤 거든지 만 마리가 모두 죽었다 그럴 때 그것을 빗물 방울로 친다면 한 골짜기에 다 모였다 해도 한 골짜기에서 한 바다로 들어가는 물일 뿐이지, 한 그릇이지 그게 두 그릇입니까?

여러분의 그 마음은 체가 없고 무량해. 그래서 무량심이에요. 일심(一心)이자 무량심이고 무량심이자 그 묘법이라. 무심도법(無心道法)은 그렇게 무량해서, 지금 수만 마리가 죽으러 간다 하는데 불쌍해서 염불을 해 주고 그런다면 그건 벌써 공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수십, 수백 마리가 죽으러 가는데 무슨 염불이 필요합니까? 염불하다 보면 벌써 다 늦는데, 하하하. 그러니까 그 순간에 그냥 모조리 이 한 그릇 자기 마음에다 탁, 거기다가 만 마리고 천 마리고 넣으면 그냥 자기 한 그릇이 돼 버리고 말아요, 네? 그러니 그대로 그냥 인간으로 환토가 되는 거죠. 자기가 돼 버리는 거죠. 그렇게 자기만 만들어 놓는다면 자동적으로 그냥 나가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돼도 그냥 아무렇게나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속을 거쳐서 나가는 인간은 나와서도 정말 사람 노릇을 하고 이 세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지략과 아량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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